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남해의봄날 제공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란 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을 떠났다. 파리의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에게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고 1957년에는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가 서베를린 음대에서 수학했다. 열 살 차가 나는 아내 이수자는 부산에서 홀로 딸 정이와 아들 우경을 키웠다.
윤이상은 아내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 유학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빛나는 음악에 대한 깊은 열망, 고향 통영에 대한 향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등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아름다웠던 봄풀이 싹틀 때 시냇가에서 우리 식구들의 소요(逍遙)가 생각나는구려. 이런 즐거운 생활은 내가 작품을 써서 유명하게 되는 것에 지지 않을 만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 나의 마누라, 내가 당신을 알뜰히 생각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당신과 같이 고국의 산천을 헤매고 있소.”(1958년 1월 17일)
존 케이지, 슈토크하우젠, 백남준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들과의 조우를 언급한 대목도 눈에 띈다. 1958년 9월, 윤이상은 세계 현대음악의 가장 전위적인 실험장이었던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습회에 참석해 여러 음악가와 교류한다. 본인 스스로는 ‘어디까지나 음악 속에 순수하게 머물고 싶으며 신기한 것으로 앞장서는 선수가 되기는 싫다’면서도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이름을 날린 백남준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다. “여기 같이 있는 백남준 군은 다행히 머리가 좋고 또 그런 심미안도 있는 것 같소. (중략) 생각해 보오. 피아노 연주에서 소리다운 소리는 전혀 없고 유리를 깨고 피스톨을 쏘고 하는 음악을… 백군 스스로도 ‘음악’이라는 용어를 여기서부터 분열시켜야겠다고 말한 바가 있소.”(155쪽)
5년 세월이 흐른 1961년 9월이 되어서야 윤이상은 아내와 함부르크에서 재회한다. 1964년에는 딸과 아들도 독일에 입국, 마침내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책 마지막 장을 장식한 가족의 모습이 그렇게 화기애애할 수가 없다. “여보! 우리 예전같이 손잡고 산보해요. 저녁이 붉게 타면 우리는 소년소녀들처럼 노래 불러요.”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