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전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단순히 세일즈맨에게 놀아나지 않기 위해 일상의 모든 호의를 거부하는 차가운 인간이 돼서는 안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치알디니의 깊이가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호의에는 호의로 답하라. 그러나 그 호의가 내 보답을 노린 호의로 판단된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치알디니는 인간이 자신의 오류를 파악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지식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아는 것(To Know)이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항하는 ‘모르는 게(Not To Know) 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지식에 대한 이 두 가지 가치관의 대결로 덮여 있다.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계몽의 핵심이며, 오늘날 과학 문명의 정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지를 존중하는 가치관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차라리 그 사실을 몰랐었다면’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지식이 오히려 함정이 되는 경우 또한 현실에서 숱하게 마주친다.
일상에서 우리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나 운, 또는 운명에 기대는 마음을 가지고 주사위를 던져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려 할 때, 우리는 사실상 이런 무지에 굴복하는 것이다. 복권을 살 때, 도박에 가까운 판단을 내릴 때, 심지어 스포츠(공은 둥글다!)에 열광할 때 우리는 무지 진영의 유산을 이어받는다.
지식의 진영은 더 많은 지식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생각하며, 인간이 끝없이 정진할 수 있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삼는다. 반면 무지의 진영은 전통을 고수하고 절제와 겸손을 강조하며, 인간을 본래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다시 인간이 가진 수많은 오류를 밝혀내며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마 세상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피천득 선생은 ‘인연’에서 세 번째 만남을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한다. 두 번 만나고 다시 만나지 못했을 때 그가 남겼을 아련한 글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