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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그날] 제주 4·3 사건 희생자 3만여명…무슨 일 있었나

[역사속그날] 제주 4·3 사건 희생자 3만여명…무슨 일 있었나

김유민 기자
김유민 기자
입력 2016-04-03 11:54
업데이트 2016-04-0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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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제주시 도련1동에서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거행된 가운데 참석자들이 헌화·분향하고 있다.
2일 오전 제주시 도련1동에서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거행된 가운데 참석자들이 헌화·분향하고 있다.
역사속 오늘, 제주 4·3 사건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제주도에서 발생한 좌익세력이 일으킨 무장봉기에 대해 1948년 4월 3일 군정 경찰과 극우세력이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무장봉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의 활동,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반감이 발단배경이 되었다. 1947년 삼일절 기념 시위 때 군정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에 항의하여 제주도민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민과 군정 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미군 철수, 단독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좌익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제주도민들의 무장봉기가 발발하였다. 미 군정이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자 이들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여 한라산을 근거지로 한 무장투쟁을 전개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압 과정에 투입된 극우세력인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2만~3만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제주도 도민들까지 희생되었고, 엄청난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에서는 3개 선거구 중 2개 지역에서 5 · 10 총선거(1948년)를 실시 못하고 1년 뒤에서야 실시되었다.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여의 시간동안 무고한 제주 시민의 희생당했다. 2014년 기준 제주 4·3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 5000여 명이지만, 전체 희생자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도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중 90%가 일반인이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 제주지구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

지금의 아름다운 제주의 오름과 숲은 당시 그들에겐 생존을 위해 몸을 숨기기 위한 장소였고, 여성들은 극단적 상황에서 성적 유린까지 당했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고, 생존에 몸부림 쳤지만 연좌제에 묶여 장래마저 막힌 인생을 살아야 했다.

마침내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의 첫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 고 노무현 대통령

그로부터 11년 후인 2014년 마침내 침묵과 금기의 역사를 깨고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잊지말고 기억해야 하는 날, 4.3.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제주 4.3 평화공원을 추천해본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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