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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다시 사귀어줄래?

나랑 다시 사귀어줄래?

입력 2012-01-01 00:00
업데이트 2012-01-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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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바보짓

안구 마우스로 오빠가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습니다. 나. 랑. 사. 귈. 래. 그 순간 제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라고 말하면 죽는 순간 후회할 거라는 것.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응”이라고 대답했고,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되었습니다. 내 남자친구는 전 농구선수 박승일입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지요.

오빠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11월이었습니다. 스무 살 때 엄마 친구 아들의 파트너로 갔던 연세대 농구팀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지요. 버스에서 파트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한 사람이 성큼성큼 제게 다가왔습니다. 어찌나 키가 큰지 머리가 천장에 닿아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순간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한테서만 빛이 나고 주변이 뿌옇게 변했습니다. 그가 제 옆에 앉더니 물었습니다. “삐삐 있어요?” “삐삐는 없고 집 전화번호는 있는데요.” 그다음 주 토요일에 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오늘 만날래요?”

영화처럼 찾아온 사랑이었지만, 오빠와 나의 인연은 줄곧 엇갈리기만 했습니다. 내가 한 발 다가서려 하면 오빠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고, 오빠가 나를 찾을 땐 내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함께하더라도 꼭 무슨 일이 있거나 오해가 생겨 헤어져야 했지요. 신기한 건 한 번도 연락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힘들 때면 오빠는 늘 내게 전화를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소속팀을 찾지 못해 힘들 때도, 농구를 그만두고 구단을 떠날 때도 그랬지요. 계속된 엇갈림 끝에 오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오빠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자연 연락도 끊어졌지요.

그러다 오빠를 다시 본 건 2002년 한 TV 프로그램에서였습니다. 최연소 코치로 발탁, 승승장구하던 오빠가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습니다. 수소문 끝에 오빠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찾았지만,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만 끝났습니다. 그러다 오빠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이혼한 뒤였습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남을 이어가던 중 오빠가 내게 말했습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를 혼자 두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오빠와 헤어져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나는 소리 내어 펑펑 울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1,000번 생각나던 게 999번만 생각나겠지,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스팸 같은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죽었니, 살았니?’ 눈에 익은 번호였습니다. 전화를 걸었더니 오빠의 큰누나가 받았습니다. “박승일 씨 휴대전화인데, 승일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루게릭병의 진행속도가 어떤지 알았으니까요. 그렇게 끈질긴 인연은 다시 이어졌고, 오빠는 다시 사귀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안아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데 괜찮으냐고. 저는 그 사람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를 안아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듯,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하니까요. 저는 오빠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싶어 2008년부턴 하던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오빠는 안구 마우스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눈으로 글자판을 짚어 의사소통을 하지요. 얼굴 근육이 점점 굳어가고 있지만, 전 오빠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도 우리는 사소한 일로 툭탁거리며 싸웁니다. 문자판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약간의 인내는 필요하지요. 싸우면 먼저 연락하는 쪽은 늘 오빠입니다. 여자 자존심이 있지, 남자가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를 보고 왔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오빠가 보고 싶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오빠는 여전히 너무 멋집니다. 오빠의 대변 냄새도 향기롭습니다. 오빠가 살아 있다는, 건강하다는 증거이니까요.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루게릭 환우를 위한 요양소 건립이라는 꿈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빠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오빠가 가진 꿈은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 가수 션 씨의 도움을 받아 승일희망재단(www.sihope.org)을 설립했지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숨 쉬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가져야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야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쥐어야 행복합니다. 저는 가장 소중한 사랑을 택했고, 지금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김중현_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 전 농구코치의 여자친구입니다. ‘소녀시대’ 수영이 한 방송에서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전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박승일 전 코치를 도와 루게릭 환우와 희귀질환자를 위한 요양소 건립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승일희망천사가 되어주실 분은 승일희망재단(02-3453-6865~6)으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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