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살해한 일본군, 56명 모두 무죄 판결 받았다

명성황후 살해한 일본군, 56명 모두 무죄 판결 받았다

박록삼 기자
입력 2015-06-26 23:28
업데이트 2015-06-27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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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 지음/메디치/312쪽/1만 5000원

1895년 10월 8일 어슴푸레 동이 트는 시간, 경복궁에 일본인 군인과 이른바 일본 낭인들이 조선 왕비의 침전으로 뛰어들어 가 왕비를 참살했다. 일본 측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고자 했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시아버지이자 ‘정적’이었던 대원군을 ‘괴뢰’로 내세워 쿠데타를 위장한 살해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의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고, 역사는 이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 불렀다.

훗날 오랜 시간 동안 시해의 주범은 낭인이었다는 것이 역사의 통설처럼 여겨져 왔다. ‘낭인’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무사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이다. 요즘 말로 하면 건달 깡패이거나 용병 또는 살인청부업자 언저리쯤이 되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단순히 무법한 낭인들이 다른 나라 왕실을 어지럽힌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일본 정규군이 저지른 국가범죄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학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정설이 되어 왔다. 언론인 출신이자 한·일 관계 역사학에 천착한 저자는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핵심 주범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일본 군부가 저지른 국가범죄로서의 진상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그 구체적 양태를 낱낱이 밝혀 낸다.

책은 당시 뒷수습을 담당했던 우치다 사다쓰지 주한영사관이 본국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과 ‘우치다 보고서’ 등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제시했다. 우치다 영사는 사건 한 달 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公電)에서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육군사관’ 역시 미야모토 소위다. 일본이 시해 주범들에 대한 법적 처분 결과에서 치밀하고 잔혹하게 계획된 국가범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 등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돼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대만 헌병대로 발령난다. 거기에서 미야모토는 대만 항일투쟁자들과 교전 중 사망하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는 못했다. 저자는 “이웃 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다른 전사자와 합사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모신 사실이 훗날 밝혀질 경우 국내외로 큰 물의를 빚을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일본인 56명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일국교 정상화 50년이 되는 해에 되돌아보는 120년 전 일본의 민낯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2015-06-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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