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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독재 권력·사회 부조리… 어디에나 있는 벽을 밀어내다

실업·독재 권력·사회 부조리… 어디에나 있는 벽을 밀어내다

이순녀 기자
이순녀 기자
입력 2021-03-24 17:28
업데이트 2021-03-25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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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런 국내 첫 개인전 ‘상신유신’
대만의 영상 작가가 고발한 현대사회
자본과 기술이 낳은 어두운 그늘 포착
실업자·노숙자 등 소외된 이들과 협업
외면해온 현실에 대한 경각심 일깨워
“현실을 직시해야 희망 찾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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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런의 영상 작품 ‘미는 사람들’은 실업자와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힘겨운 현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어 힘을 보태는 연대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천제런의 영상 작품 ‘미는 사람들’은 실업자와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힘겨운 현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어 힘을 보태는 연대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거친 손들이 육중한 금속판을 밀고 있다.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은 금속판을 미는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묵묵히 밀어낼 뿐이다. 어두운 조명 아래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금속 마찰음만이 고된 노동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만의 영상 작가 천제런의 작품 ‘미는 사람들’(2007~2008)이다. 실제로 금속 컨테이너 형태의 공장, 불법 건축물, 건설 현장 숙소 등에서 실업노동자, 노숙자들과 함께 촬영한 영상이다. 대만의 혹독한 계엄 시기(1949~1987)에 반체제 성향의 전시와 퍼포먼스로 권력에 저항했던 천제런은 계엄 해제 후 8년간 예술 활동을 접었다가 1996년 작업을 재개하면서 실업자,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민자 등 소외된 이들과 협업해 왔다. 현대사회의 자본과 기술이 파생시킨 폭력과 통제, 감시와 고립의 어두운 그늘을 예리하게 포착한 영상 작업들은 그를 아시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상 수상으로 한국과 남다른 인연이 있는 천제런의 국내 첫 개인전 ‘상신유신’이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 마련됐다. 1990년대부터 2017년까지 시기별 대표 영상 작품 6점과 사진 연작 1점을 만날 수 있다. 제목의 ‘상신’(傷身)은 트라우마를 겪은 신체를, ‘유신’(流身)은 변화하는 신체를 뜻한다. 지난 11일 개막식에 맞춰 내한한 작가는 “트라우마적 경험이 본래 가졌던 생각을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고 생각한다”면서 “현실적 문제들을 직시해야만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의미를 짚었다.

가족사에서 비롯된 작업들이 눈길을 끈다. 사진 연작 ‘별자리표’(2017)와 영상 ‘필드 오브 논-필드´(2017)는 장기 실업으로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던 친형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퇴원 후 이상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행동을 보였던 형에 대해 작가는 “치유의 과정이며, 본인만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다시 수립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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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연작 ‘별자리표’의 일부. 장기 실업자로 우울증을 앓았던 천제런 작가의 친형에 대한 이야기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사진 연작 ‘별자리표’의 일부. 장기 실업자로 우울증을 앓았던 천제런 작가의 친형에 대한 이야기다.
아트선재센터 제공
1996년 대만의 기업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강제로 공장 폐쇄를 당한 의류 공장의 여공들을 응시한 ‘공장’(2003)도 실제 작가의 누나가 여공의 삶을 살았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이다. 작가는 폐쇄된 공장을 지키는 여공들과 10개월간 함께 생활한 뒤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영상 작업을 제의했고, 여공들은 영상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응했다고 한다. 수년간 세상을 향해 숱하게 외쳤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에 대한 반어적 대응이었다.

서구 열강의 침탈과 독재 권력의 강압,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대량 실업 등을 돌아보게 하는 ‘능지: 기록 사진의 전율´(2002), 감시 카메라와 컴퓨터 기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상황을 앞서 내다본 ‘12연기에 대한 노트’(1999~2000) 등은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전시는 오는 5월 2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2021-03-2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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