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터미널’

[공연리뷰] 연극 ‘터미널’

입력 2013-10-28 00:00
업데이트 201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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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작별이 공존하는 그곳… ‘시크릿 박스’ 9인 9색 무대를 만나다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유행해 한국의 유통계에도 번진 ‘시크릿 박스’라는 게 있다. 자신에게 줄 선물상자를 직접 구입하는데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옷이나 화장품, 간식 등 무엇이든 나올 수 있는데 더러는 마음에 들고 더러는 필요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는 짜릿함이야말로 시크릿 박스를 사는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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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개막한 연극 ‘터미널’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시크릿 박스’와 비슷하다. ‘터미널’이라는 주제를 놓고 9명의 작가가 9편의 단편 희곡을 쓰고, 공연마다 5편씩 옴니버스 형식으로 무대에 올린다. 어느 날 어느 공연이 올라가는지는 티켓을 예매할 때 알 수 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공연만 보기 위해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다면 마치 시크릿 박스를 여는 듯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터미널’에 참여한 작가들은 ‘창작집단 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들이다. 박춘근, 고재귀, 조정일, 김현우, 김태형, 유희경, 천정완, 조인숙, 임상미 등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다. 이들은 2004년 창단한 이후 희곡, 시, 소설 등에서 개인 활동을 하는 한편 공동 창작을 통해 다양한 연극적 실험을 이어 왔다.

이들이 설정한 ‘터미널’이라는 공간은 만남과 헤어짐, 출발과 도착이 있는 곳이다. 각각의 단편들에는 만남의 설렘과 아쉬운 작별, 새로운 여정이 있다. 농촌 총각과 베트남 여성이 서울역에서 어색하게 마주할 때(‘터미널’) 메텔과 철이는 오지 않는 은하철도 999를 기다리며 좌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은하철도 999’). 한 여자가 못난 마음과 결별하기 위해 동해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동안(‘나에게 쓰는 편지’) 향락과 성욕을 가득 담은 KTX 열차는 시승객을 기다리며 시동을 켠다(‘러브 러브 트레인’). 공연 시간이 10~20분 정도인 각 단편들은 극적인 기승전결은 없지만 간결한 언어로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9편의 단편들은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작가 개개인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단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그리 강하지는 않다. 터미널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터미널을 통과한 뒤 마주한 광경들을 그린 이야기도 있다.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도 있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작품도 있다. 터미널이라는 통일성은 얕게 깔려 있지만 전체의 합일을 위해 각 단편들을 끼워 맞추지는 않았다.

한 편의 완결성 있는 공연을 원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도 주제도 제각각인 작품들을 예상치 못한 순서와 조합으로 접하는 건 충분히 흥미롭다. 이들이 터미널이라는 공통분모를 절묘하게 나누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터미널 대합실에 앉아 있으면 어디서 누가 나타나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 달 10일까지 서울 용산구 프로젝트박스 시야. 전 석 3만원. (02)744-4331.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2013-10-2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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