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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불의 심판 받는 黑磁…색을 태우고 우주의 신비 품다

날마다 불의 심판 받는 黑磁…색을 태우고 우주의 신비 품다

입력 2014-01-29 00:00
업데이트 2014-01-29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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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쇠퇴 ‘흑유도기’ 혼 이어가는 도예가 김시영 父女

“삼라만상 모든 빛깔이 흑유도기(黑釉陶器)에 담깁니다. 20여년에 걸쳐 확신을 얻었지만 끊임없이 배우며 노력하고 있어요. 흑유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도 늘었습니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두 딸도 가업을 이어 흑유 작가가 되려고 하죠. 뿌듯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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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흑유’에 매달려 살아온 김시영(왼쪽)씨와 가업을 잇는 두 딸 자인(가운데)·경인씨. 경기 가평의 가평요에서 세 부녀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롯데갤러리 제공
20여년간 ‘흑유’에 매달려 살아온 김시영(왼쪽)씨와 가업을 잇는 두 딸 자인(가운데)·경인씨. 경기 가평의 가평요에서 세 부녀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롯데갤러리 제공


흑유도기는 4~5세기 조질토기(粗質土器)와 함께 한국 도자의 서막을 알린 존재다. 고려시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옹기 형태의 흑자(黑磁)는 ‘오자기’, ‘석간주’ 등으로 불렸고, 청자와 백자 가마터에서 부수적으로 구워져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흑자는 흑색이 음색으로 터부시되면서 일상에서 쓰이지 못했다. 그렇게 맥이 끊겼다는 게 정설이다.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흑자는 중국에선 흑유, 일본에선 천목(天目)이라 불리며 여전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흑색, 적갈색에만 머물지 않고 검은 색 속에 숨어 있는 요변이란 색상을 무궁무진한 무늬로 표현하며 발전해 왔다. 흑유의 일종인 송나라의 ‘요변천목’은 일본에선 국보가 됐다.

국내에는 지난 20여년간 흑자에만 매달려 온 김시영(56) 작가가 있다. 청자와 백자에 한눈 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팠다. 옹기, 흑유의 산지인 경기도 가평에 터를 잡고 ‘가평요’를 운영하고 있다. 가평군 설악면의 청평댐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작업실이다. 이곳 토박이인 그는 초등학교 때 서울 유학길에 올라 두남체의 창시자인 서예가 고(故) 이원영의 집에 머물며 학교를 다녔다. 먹을 갈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다 용산공고에 입학해 처음 ‘불’을 알게 됐어요. 용광로를 거친 금속이 전혀 다른 질감의 물체로 재탄생하는 것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지요.”

1977년 연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난다. 바로 산이다. 대학 산악회에 들어가 산을 오르내렸다. “1983년엔 알프스의 드류 서벽에 도전했다가 사흘간 조난되기도 했어요.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며 예술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어요.”

산에 오르던 어느 날 화전민터에서 흑유 파편을 보게 됐고, ‘어떻게 도자기가 까맣지’하는 궁금증에 흑자를 파고들었다. 잠시 다니고 있던 현대중공업을 그만두고 연세대 산업대학원에서 세라믹 재료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평요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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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씨의 흑유 달항아리
김시영씨의 흑유 달항아리


“아무리 빼어난 청자나 백자라도 색의 차이는 크지 않아요. 다만 흑유에는 우주의 신비만큼 무궁무진한 색이 숨어 있어요. 빚는 법은 비슷해도 흑유는 불에 민감해 매번 다른 색이 나옵니다. 고색창연한 색이라도 나오면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흑유를 시작하고 10년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마에 불을 지폈다. 분청은 가마 온도가 1230도, 청자는 1270도, 흑자는 1300도에서 구워진다. 그는 “1년에 최소 300번 불을 지피면 그중 마음에 드는 색을 찾는 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요즘은 고령토, 규석, 사토 등을 사용해 다양한 유색의 흑자를 굽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금도 동네 뒷산을 오르내립니다. 직접 흙을 채취해 작품에 사용하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두 딸도 최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려흑자의 맥을 이어나가겠다고 자청했다. 두 딸은 번갈아가며 아버지의 가마를 지키고 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큰딸 자인(28)씨는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특별전에 참여한 기성 작가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배낭을 짊어지고 흙을 채취하러 가평의 이 산 저 산을 누볐다”면서 “날마다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의 흑자 작업은 삶의 집약체”라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둘째 딸 경인(24)씨는 흑자의 빛깔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인씨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흑자에 다가가도록 다양한 작품을 시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 세 부녀는 다음 달 5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흑유명가 가평요’전을 연다. 1대 김시영 작가의 흑유작품인 달항아리, 생활자기 외에 큰딸 자인씨의 자기로 만든 하이힐 작품과 둘째 딸 경인씨의 앙증맞은 과일모양 자기 등 70여점이 나온다.

이들은 “흑자가 세상과 좀 더 가까이 호흡했으면 한다. 우리나라 전통도자인 동시에 발전 가능성이 큰 흑자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2014-01-2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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