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아파트 뒤꼍을 환하게 비추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엄마가 보고 있으면 어쩌지?’
10층 베란다 창문을 열고 엄마가 내다볼 것이 걱정되었다. 고개를 쳐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내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줄넘기의 나무 손잡이를 두 손에 나눠 잡았다가 나무의자 위에 슬그머니 놓았다. 줄넘기는 정말이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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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구름이 조금 떠 있긴 해도 달빛은 더없이 환했다. 한참을 자세히 올려보자 구름 사이로 별이 또렷또렷 보였다. 바람이 불어와 귀 앞머리카락을 쓸었다.
‘뭐, 줄넘기 백번 넘었다고 하면 그만이지.’
백번 다 넘었다고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것으로 해야 옳을는지 걱정이긴 했다.
‘어, 뭐지?’
의자 아래로 내려뜨린 발에 무언가 닿았다. 털이 달린 말캉한 무엇.
‘강아진가.’
주인을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가 다리를 건드렸나 했다. 궁금해진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나무의자 밑을 들여다보았다.
“어, 고양이잖아.”
고양이는 아직 어린 새끼에 가까웠다. 온 몸이 흰 털로 덮인, 귀가 조뼛하고 눈이 동그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늘어뜨려져 있는 줄넘기 줄을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넌, 어디서 왔니? 줄넘기 하고 싶어서 그래? 너, 할 수 있어?”
나는 길쑴한 다리와 꼬리까지 온통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달아날 생각을 않고 줄을 주욱 당겨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 밤이 깊은 시간도 아닌데 다른 날에 비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안 띄었다.
“넌 줄넘기 못할 거야. 내가 한번 시범을 보여줄게. 참, 이름을 지어줄게. 은고양이, 어때?”
나는 줄넘기 줄을 주워들고 줄넘기를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무번을 넘자 헉헉 숨이 찼다.
“봐, 은고양이야, 이렇게 숨이 찬다니까.”
말을 마치고 돌아보았을 때 흰 고양이는 간 곳이 없었다. 내게 줄넘기를 하게 해놓고 슬그머니 가버린 듯했다.
달은 여전히 밝았다. 달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초록 빛깔이 아닌 흰빛으로 보일 지경으로 희게 빛났다. 은고양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금요일이었다.?
“야, 땡이!”
학교 가는데 정욱이가 뒤에서 불렀다.
“왜애?”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질렀다. 아이들은 김동엽 이름을 두고 땡이 별명을 불렀다.
땡이는 그래도 낫다. 어떤 애들은 뚱땡이 아니면 뚠띠라고도 했다.
정욱이는 앞서 걷고 있는 내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 숙제 했어?”
정욱이는 숙제 얘기부터 꺼냈다.
“숙제? 아니.”
“안 했어?”
정욱이는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저녁밥 먹은 다음 하려고 했는데 너무 졸려워서 그냥 잤어.”
너무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내 방으로 가지도 못하고 거실 카펫에 누워, 엄마가 아침에 깨울 때까지 계속 잤다.
“선생님한테 혼날걸.”
“할 수 없지, 뭐.”
혼날 때 혼나더라도 혼날 일을 나는 미리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든 먹고 금세 자면 땡이 되는 거 몰라?”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스르르 풀었다. 말라깽이인 정욱이가 등에 멘 가방을 촐싹이며 앞장서 걸어갔다. 정욱이를 볼 때면 동생 세엽이가 생각난다.?
세엽이는 한 살이 아래인데 깽이, 깽이, 말라깽이다. 어디 특별히 아픈 데가 없는데도?아픈 아이처럼 바싹 마른 하얀 세엽이, 뭐든지 안 먹는 세엽이….
나는 학교 공부 세 시간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수요일은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 주는 날이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간식은 뭐든 다 맛있다. 피자, 김밥, 오징어튀김, 잡채, 어묵탕….
아파트 정문 뒷길로 해서 집 쪽인 102동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101동 쪽에서 뭔가 휘익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뭐지?’??
까망에 하양이 섞인 고양이 한 마리가 키 작은 쥐똥나무 밑으로 재빠르게 달아났다. 몸이 작은 걸 보니 새끼 같았다.
‘얼룩이 고양이네. 먹을 걸 찾나 본데…. ’
그렇게 생각하자 배가 갑자기 많이 고파왔다.
‘저런 길고양이들은 뭘 먹고 살까?’
언뜻 보았지만 얼룩이 고양이의 배는 훌쭉했다. 하루를 꼬박 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틀…. 땅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더 말라 보였었다.
‘저번에 본 흰 고양이는 어디 있을까?’
내 그림자는 내가 보기에도 뚱뚱하다. 어깨도 뚱뚱, 목도 배도 허벅지도 발목도 뚱뚱, 어디든지 다 뚱뚱….
“에이!”
조금 걸었는데도 땀이 많이 나서 짜증은 더 났다.
424, 424, 99 현관 번호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도 세엽이도 집에 없었다.
냉장고 문을 홱 열었다. 현관 번호 424, 424, 99를 누를 그때 침은 벌써 꼴까닥 넘어갔다. 424는 사이다, 99는 치킨!?냉장고에는 사이다도 없고 치킨도 없었다. 그래서 사이다 대신 요구르트 다섯 개, 치킨 대신 언제 먹다 두었는지 모를 탕수육을 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정신없이 먹고 났을 때 전화벨이 따르르릉 울렸다.
“동엽이니?”
엄마였다.
“응.”
“너, 또 뭐 먹었구나.”
엄마는 뭘 먹었는지부터 따졌다.
“아니.”
“뭐가 아니니? 뭘 먹은 목소리인데.”
엄마는 내가 뭘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고 했다. 목소리가 텁텁하게 들리고 먹은 음식의 냄새까지 난다고 했다.
“탕수육 남은 거 하고 요구르트.”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세엽이 자면 조용히 해라. 세엽이 깨지 않게.”
엄마는 자나 깨나 세엽이 걱정이다. 깽이, 깽이 말라갱이 세엽이. 세엽이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그림 그리기, 만들기 같은 것을 가르치는 ‘푸른교실’에 다닌다.
세엽이네 선생님은 머리를 길게 기른 대학생 누나다. 엄마가 일이 있어 엄마 대신 세엽이를 푸른교실에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엄마가 시킨 대로 대학생 선생님에게 꼬박 인사를 했다. 그러자 대학생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어머나, 세엽이 형이니? 맞아?”
대학생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그러자 대학생 선생님은 말했다.
“어머나, 동생 먹을 걸 다 뺏어 먹었나 보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것에 대해 한마디 할 것 같았는데 단번에 말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아닌데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뭐가 아냐? 뻔해.”
대학생 선생님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기까지 했다.?
“나는 뭐든지 다 잘 먹고, 세엽이는 뭐든지 다 안 먹어서예요.”
억울하게 당할 수만은 없었다. 절대!
“그건 그래. 여기서도 간식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나는 간신히 누명을 벗었다. 억울한 건 풀렸지만 다음부터 푸른교실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말해 놓았다. 그 뒤 정말로 한 번도 안 갔다.
“목욕들 안 하니?”
저녁 먹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엄마가 불렀다. 세엽이가 쪼르르 밖으로 나왔다.
“…난 조금 있다가.”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눈을 갑자기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때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곤 했다.?
“그래, 잘됐네.”
엄마는 다른 날과 달리 순순히 대답했다.
“뭐가 잘됐는데, 엄마?”
나는 엄마 눈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줄넘기 하고 들어와서 씻으면 되겠다.”
“누가?”
모르는 척 물었다.
“누군 누구야? 너지.”
“싫어.”
“싫긴 뭐가 싫어. 줄넘기하고 들어와서 씻으면 두번 씻지 않아 좋잖아. 서늘할지 모르니 웃옷 하나 더 걸치고.”
엄마는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얇은 점퍼와 줄넘기를 내다주었다.
“내기 제일 싫어하는 게 줄넘기인 거 엄마도 알잖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
“줄넘기 백번 넘기 싫으면 아파트를 세 바퀴 달리고 오든지.”
“달리기도 싫어하는 거 엄마도 알잖아!”
“줄넘기도 싫고, 달리기도 싫고… 그럼, 팔굽혀 펴기 서른 번 할 테야?”
엄마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세엽이는 옷을 홀랑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엽이의 벗은 궁둥이는 내 궁등이의 반도 안 되었다.
“거실에서 하면 안돼?”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한데도 물었다.
“네가 뛰면 102동 아파트 전체가 쿵쿵 울릴 걸 아마.”
엄마는 말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점퍼와 줄넘기를 손에 쥐어주며 신도 제대로 못 신은 내 등을 떼밀었다.
“왜 미는 거야?”
나는 밀리지 않으려 두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아파트 뒤꼍으로 나온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줄넘기 줄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만날 나만 갖고 그래!’ ?
목욕탕에서 나온 세엽이는 요플레를 먹을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 딸기 요플레와 키위 요플레가 있는 걸 보아 두었다. 냉장고 오른쪽 둘째 칸에.
‘보름달이 아파트 뒤꼍을 환하게 비추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엄마가 보고 있으면 어쩌지?’
10층 베란다 창문을 열고 엄마가 내다볼 것이 걱정되었다. 고개를 쳐들어 윗쪽을 올려다보았다. 내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줄넘기의 나무 손잡이를 두 손에 나눠 잡았다가 나무 의자 위에 슬그머니 놓았다.?줄넘기는 정말이지 싫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어, 지난번에도 지금과 꼭 같았는데….’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놀라 둘레를 두리번거렸다.
‘은고양이가 오지 않을까?’
줄넘기 줄을 나무의자 아래로 늘어뜨려 놓고 삼십 분이 넘도록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넷… 스물 하나….”
나는 하나 둘을 세며 타닥타닥 줄넘기를 넘기 시작했다. 어느새 달빛을 받아 털이 더 새하얀 은고양이가 나와 함께 줄넘기를 넘었다.
“… 여든 하나, 여든 둘….”
백까지 다 세고 돌아보았을 때 은고양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은고양이야, 잘가!”
언젠가 한번은 세엽을 데리고 나와 은고양이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달빛을 받아 온통 새하얀 은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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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이상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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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이상교씨
● 작가의 말
몹시 배가 고파 보이는 길고양를 보았다. 길고양이에게 무엇이든 먹이려 슈퍼에서 참치 한 캔을 사 뚜껑을 따 주었다. 길고양이는 내가 멀리 떨어져 앉자 다가와 허겁지겁 먹었다. ‘잘가, 은고양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뚱뚱한 동엽이와 보름달밤 은고양이가 만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을 빼야 한다든지, 숙제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그런 자질구레한 일로 분주해 있을 때에도 ‘꿈결 같은 은고양이’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 작가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성장했다. 1973년 소년 잡지에 동시가 추천 완료되었고, 197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부문 입선, 1977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부문 입선 및 당선됐다. 지금은 한국동시문학회 회장과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2009-09-2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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