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도루.
동경제대 출신으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종교조사촉탁과 조선도서조사촉탁 등을 맡아 조선의 유학을 연구정리한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 유학’과 관련해 배우는 주기론, 주리론, 사단칠정같은 개념도 모두 다카하시에 의해 부각됐다. 일제 관변학자로 일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황도유교(皇道儒敎)’의 창시자다. 그러니 ‘다카하시 극복’이 최근 유학자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다카하시의 논의를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글로벌컬처연구소 고희탁 연구원이 반년간지 ‘오늘의 동양사상’에 기고한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사상사론의 양면성’이 화제의 글. 고 연구원은 외려 “이제 우리도 식민사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식민사관 콤플렉스 벗어나야”
사실 조선 지배층의 헤게모니는 임진왜란에서 끝났다. 임진왜란은 지배층의 무능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뻔히 궁궐에 앉아 있는데도 궁내를 휘저으며 도둑질하고, 피란길에 오른 임금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왜란이 끝난 뒤 조선 지배층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반동적 보수화였다. 그럼에도 우리 연구자들은 조선후기사를 부정적으로 그려내는데 상당히 망설인다. 부정적으로 그리면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고 연구원의 글도 이런 맥락에 있다.
그는 먼저 다카하시의 연구를 ‘지식사회학적 관점’이라 본다. 조선 유학을 철학적 기반이나 개별 학설보다 ‘정치적 영향력’에서 본다는 것. 고 연구원은 “다카하시가 단순히 조선 유학을 폄하만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다만 학문적 논쟁이 점차 정치적 권력투쟁과 연결되면서 굉장히 소모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 비판적이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카하시가 다산 정약용에 주목하는 과정을 눈여겨 본다. 다카하시는 조선유학에 대한 비판과 달리 유학의 실용적 측면을 되살리는 다산을 “조선 사상사의 석학”이라고 극찬한다. 재미있는 점은 다카하시가 1930년대 이런 주장을 내놓는 시점에서 조선 민족주의자들도 ‘실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조선사상사의 석학”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 비판에 대해 고 연구원은 ‘학자지배’ 사회에 대한 와타나베 히로시의 연구를 인용한다. 와타나베는 되묻는다.“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배층이 왜 학문에서는 이를 모른 체하고 ‘도의’라는 엄숙한 자기규율적인 이론체계를 채택하는가.”그것은 학자지배 사회의 근본조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와타나베의 지적이다.
즉, 존재 이유가 불명확한 특권층일 경우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는 것. 왜란 이후 조선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극단적으로 경직된 이론체계로 밀어붙여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게 고 연구원의 설명이다.
고 연구원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다카하시는 지금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공공성 개념이 약했다는 점에서 조선 유학을 비판하지만 실학과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상당히 변화한다.”물론 한계는 있다. 고 연구원은 “관변학자로서 ‘황도유교’ 철회를 선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동경제대 출신으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종교조사촉탁과 조선도서조사촉탁 등을 맡아 조선의 유학을 연구정리한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 유학’과 관련해 배우는 주기론, 주리론, 사단칠정같은 개념도 모두 다카하시에 의해 부각됐다. 일제 관변학자로 일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황도유교(皇道儒敎)’의 창시자다. 그러니 ‘다카하시 극복’이 최근 유학자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다카하시의 논의를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글로벌컬처연구소 고희탁 연구원이 반년간지 ‘오늘의 동양사상’에 기고한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사상사론의 양면성’이 화제의 글. 고 연구원은 외려 “이제 우리도 식민사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식민사관 콤플렉스 벗어나야”
사실 조선 지배층의 헤게모니는 임진왜란에서 끝났다. 임진왜란은 지배층의 무능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뻔히 궁궐에 앉아 있는데도 궁내를 휘저으며 도둑질하고, 피란길에 오른 임금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왜란이 끝난 뒤 조선 지배층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반동적 보수화였다. 그럼에도 우리 연구자들은 조선후기사를 부정적으로 그려내는데 상당히 망설인다. 부정적으로 그리면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할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고 연구원의 글도 이런 맥락에 있다.
그는 먼저 다카하시의 연구를 ‘지식사회학적 관점’이라 본다. 조선 유학을 철학적 기반이나 개별 학설보다 ‘정치적 영향력’에서 본다는 것. 고 연구원은 “다카하시가 단순히 조선 유학을 폄하만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다만 학문적 논쟁이 점차 정치적 권력투쟁과 연결되면서 굉장히 소모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 비판적이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카하시가 다산 정약용에 주목하는 과정을 눈여겨 본다. 다카하시는 조선유학에 대한 비판과 달리 유학의 실용적 측면을 되살리는 다산을 “조선 사상사의 석학”이라고 극찬한다. 재미있는 점은 다카하시가 1930년대 이런 주장을 내놓는 시점에서 조선 민족주의자들도 ‘실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조선사상사의 석학”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 비판에 대해 고 연구원은 ‘학자지배’ 사회에 대한 와타나베 히로시의 연구를 인용한다. 와타나베는 되묻는다.“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배층이 왜 학문에서는 이를 모른 체하고 ‘도의’라는 엄숙한 자기규율적인 이론체계를 채택하는가.”그것은 학자지배 사회의 근본조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와타나베의 지적이다.
즉, 존재 이유가 불명확한 특권층일 경우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는 것. 왜란 이후 조선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극단적으로 경직된 이론체계로 밀어붙여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게 고 연구원의 설명이다.
고 연구원의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다카하시는 지금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공공성 개념이 약했다는 점에서 조선 유학을 비판하지만 실학과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상당히 변화한다.”물론 한계는 있다. 고 연구원은 “관변학자로서 ‘황도유교’ 철회를 선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05-11-1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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