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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수퍼파워’ 스페인 사례로 본 美부채협상

16세기 ‘수퍼파워’ 스페인 사례로 본 美부채협상

입력 2011-08-01 00:00
업데이트 2011-08-0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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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부채 문제를 둘러싼 여야간 대립이 16세기 스페인의 국가부채 위기 당시와 유사한 양상이라고 크리스토프 참리 보스턴대(大) 경제학과 교수가 1일 블룸버그 통신 기고문을 통해 지적했다.

지난 1575년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1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국채 위기는 역사상 첫 국채 위기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왕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지중해 레판토 해전 등의 군사 활동을 활발히 벌인 결과 국가부채가 급증, 1573년에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절반까지 이르게 됐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장기 국채를 상환하기 위해 세금 인상을 추진했으나, 실제 조세 징수를 담당하고 국왕과 세율 협의권을 갖고 있었던 카스티야 지방의 18개 주요 도시들은 증세에 반대했다.

오늘날 공화당과 같은 역할을 맡은 이들 도시의 저항으로 펠리페 2세는 증세에 실패했고, 이후 2년간 대립 상태가 지속됐다.

그 결과 펠리페 2세는 1575년 9월 이들 도시를 움직이기 위해 주로 제노바의 은행들이 보유한 단기 국채의 상환 유예라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전면적인 디폴트(부채상환 불이행) 사태와 신용위기로 이어졌다.

당시 외국인 은행가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스페인 국민들은 단기 국채 상환 유예 조치를 환영했다.

또 각 도시들도 펠리페 2세가 자신들의 도움으로 증세를 하지 않으면 추가 국채 발행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 디폴트 사태로 자신들의 지출 삭감 요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번졌다고 참리 교수는 지적했다.

펠리페 2세에게 대출을 해준 은행들 상당수가 차입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디폴트 사태로 은행들이 지역 상인들의 예금에서 조달하던 자금이 경색되기 시작했다.

또 오늘날과 달리 통신 수단이 부족했던 당시 금융시장은 정기적으로 시장 참가자들이 모여 직접 대면하는 정기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폴트 사태로 스페인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핵심 금융 정기 시장인 메디나 델 캄포 정기 시장이 취소되는 등 은행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됐고, 이는 심각한 경기후퇴를 가져왔다.

결국 2년 후인 1577년 각 도시들이 펠리페 2세에게 굴복해 사태 종식을 간청하며 세율 인상에 동의, 국채 상환이 재개되며 금융시장이 제 기능을 되찾았으나 이전과 같은 활기는 되찾지 못했고 스페인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것.

참리 교수는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스페인의 국가신용도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특히 공화당에게는 자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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