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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임영웅도 좋지만, 인문문화 영웅도 살피자/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열린세상] 임영웅도 좋지만, 인문문화 영웅도 살피자/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1-11-07 17:46
업데이트 2021-11-08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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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요즘 국내의 막장 정치판과는 다르게 한류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으니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한국이 전 세계로부터 세계적인 문화국으로 숭앙받고 있는 줄로 착각마저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외국인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반적인 추세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노래와 춤을 잘하고 드라마를 잘 만든다고 해서 한국을 문화적인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특히 선진국의 지성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할 것이라 본다.

어떤 나라가 문화적으로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가릴 때 우리는 그 나라가 노래나 춤, 드라마 그리고 스포츠를 잘하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나라가 사상(종교)이나 역사·문학 같은 인문학, 그리고 과학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은 특히 인문학이 턱없이 약하다. 이 분야에서는 도무지 세계에 내놓을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인이 그동안 인문학을 백안시했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인문학에 대해 아주 기이한 태도를 보였다. 인문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취직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죽이기 바빴던 것에 반해 사회에서는 인문학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니 말이다. 아니,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사회에서 인문학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국이 인문문화적으로 미천한 나라로 비칠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혹시 외국의 지성들이 한국인을 두고 ‘당신들은 노래와 춤, 드라마밖에 잘하는 것이 없지 않으냐’고 힐문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때 한국인은 적절하게 응대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건 자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대단한 인문문화를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자인 한글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훈민정음 해례본’과 한국인의 대단한 기록 정신을 보여 주는 ‘고려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과 같은 세계사적인 서책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으니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이 유물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른다. 내가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유물 자체가 아니라 유물들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경위다. 이것들은 종이 아니면 나무로 돼 있어 불에 취약하다. 따라서 전란이 나면 다 없어지기 마련인데 이것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것은 우리에게 문화 영웅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해례본’을 구입해 끝까지 지킨 전형필, 6·25 때 미군의 해인사 폭격 명령에 목숨을 걸고 ‘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대령, 임진왜란 때 단 한 질밖에 남지 않은 ‘실록’을 사수한 손의와 안흥록, ‘직지’를 발견하고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것을 사력을 다해 증명한 박병선이 바로 우리의 영웅이다. 나는 최근에 박병선을 중심으로 이분들에 관한 책을 냈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크게 놀랐던 것은 이분들에 관한 연구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분개하며 어이가 없어 시쳇말로 ‘멘붕’이 됐다. 이 책에서 나는 박병선을 주로 다뤘는데 그가 ‘직지’(그리고 ‘조선왕조의궤’)를 발견하고 그것이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추적했다. 그런데 문서 자료가 별로 없어 박병선의 강연이나 인터뷰를 모아 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분은 사정이 더 열악했다. 전문적인 연구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 ‘한국인들 정말 큰일 났구나. 이런 문화 영웅들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하면서 자탄 어린 푸념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자고로 조상을 돌보지 않는 민족은 흥할 수 없는데, 이분들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영웅들 아닌가. 트로트의 임영웅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인에게 진정한 영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래야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우리는 연예만 능한 민족이 아니라 높은 인문문화를 갖고 있다’고 외칠 수 있다.
2021-11-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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