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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듣지 않을 권리/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듣지 않을 권리/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입력 2011-12-21 00:00
업데이트 2011-12-2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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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조국 러시아를 이렇게 묘사했다. “철없이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가까이 들려온다. 끝없는 공간이 생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 광활한 공간이 바로 러시아이다.”

여기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생동감을 상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소음이 될 수 있다. 아파트 윗집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서 생동감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층간 소음은 세대 간에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민원을 촉발하며 최악의 경우 살인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층간 소음뿐 아니라 소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는 공해다. 세계보건기구는 소음공해가 대기오염보다도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소음은 청력에 손상을 주고 집중력을 방해하며 심혈관 질환을 악화시키고 스트레스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켜 인체의 면역시스템을 약화시킨다. 지속적으로 소음에 노출된 사람은 과도한 공격성을 보인다는 보고서도 있다.

환경부는 소음을 “기계, 기구, 시설, 그 밖의 물체의 사용 또는 환경부령으로 정하는 사람의 활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강한 소리”라고 정의한다. 주거지역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고 주간이냐 야간이냐에 따라 소음기준치는 40데시벨(dB)에서 65데시벨까지 달라진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게 정책적이고 기술적이고 의학적으로 정의되는 소음 외에 또 다른 유형의 소음이 존재한다. 그것은 정서적이고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소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전혀 소음처럼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호텔이나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의 편안한 음악소리는 소음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나른하고 천편일률적인 멜로디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분명 소음이다. 택시기사가 큰 소리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나 광고방송, 누군가가 누군가와 킬킬대며 주고받는 ‘토크’는 조용히 목적지까지 가고 싶은 승객에게 분명 소음이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3시간 동안 줄기차게 계속되는 TV 드라마 역시 TV 시청을 즐기지 않는 승객에게는 소음을 넘어 공해다.

우리 사회처럼 소리에 관대한 사회가 또 있을까. 정말이지 듣지 않을 권리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음식점 벽에 걸린 TV, 치과병원 대기실의 TV, 대학병원 입원실의 TV에서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말소리, 음악소리, 웃음소리. “관리실에서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로 시작되는 아파트 관리소장의 말소리, 카페와 헬스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24시간 영업하는 찜질방과 사우나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TV 소리. 이런 소리들이 몇 데시벨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강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가 원치 않는 소리는 나에게 소음이다. 심지어 자연의 소리도 소음일 수 있다. 새벽에 창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소음일 수 있고, 아주 작게 어디선가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도 소음일 수 있다.

이런 소리의 원인 제공자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으로 규제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카페, 음식점, 병원, 버스에서 소리를 제공하고 그 소리를 아무 저항감 없이 수용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소리에 관대한 사회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소음은 교육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말하고 쓰는 법뿐만 아니라 침묵하는 법, 정적에 익숙해지는 법, 타인의 청각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들을 권리가 있다면 타인에게는 듣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온갖 소리와 소음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서 가끔은 침묵이 필수적임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정신력은 최고조에 이른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홀로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던 파스칼의 말과 함께.

2011-12-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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