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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영욕의 아웅산 수치/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영욕의 아웅산 수치/임병선 논설위원

임병선 기자
입력 2021-02-01 20:14
업데이트 2021-02-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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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아웅산 장군은 영국이 자신의 조국을 1886년 합병한 뒤부터 반영(反英) 활동을 주도했다. 아웅산국립묘지는 1947년 7월 19일 33세의 이른 나이에 양곤에서 암살된 그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한국에는 1983년 9월 10일 북한의 폭탄 테러로 각인된 현장이다. 그는 민족주의 조직 ‘도바마 아시아요네’에서 1939년 총서기가 됐는데 1940년에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독립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일본이 버마(미얀마 전신)를 점령한 뒤 국방장관에 임명된 이유다.

일본을 등에 업고선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연합군 편으로 돌아섰다. 1944년 민족주의 지하조직인 인민자유연맹의 결성을 돕고 총리로서 역할했지만 실은 영국 총독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1947년 1월 애틀리 영국 총리와 1년 안에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하는 협정서를 발표했는데 6개월 뒤 그를 포함해 각료 6인이 암살됐다.

아버지가 스러졌을 때 수치는 두 살이었다. 인도 대사로 임명된 어머니 킨 치를 따라 인도에서 공부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해 남편을 만났다. 어머니의 병 구완을 위해 1988년 영국에서 귀국할 때까지 평온한 삶을 살았다. 독재자 네 윈이 군부 통치에 저항하는 이들을 학살하는 것을 본 뒤 독재를 규탄하는 연설을 해 일약 민주화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군부는 나라 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그녀를 가택에 연금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창당한 민족민주연합(NLD)이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의 80%를 차지했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노벨위원회는 이듬해 수치에게 평화상을 수여해 민주화 운동에 힘을 실었다. 수치의 가택연금은 2002년까지 지속됐다. 2010년 2차 연금이 풀리고 2012년 정치활동이 허용돼 양곤의 지역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NLD가 집권하자 수치는 이듬해 틴 초 대통령에게 정부 구성의 권한을 넘기고 국가자문위원으로 물러났다. 수치는 미얀마의 실권자였다. 그러나 이듬해 군부가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75만명을 탄압해 국제 여론이 악화할 때 수치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는 수치가 군부의 폭정에 침묵하고 언론의 자유를 압살하는 것을 방관한다고 개탄했다.

53년의 군부 통치를 종식시킨 수치이지만, 1일 군부 쿠데타로 다시 연금됐다. 군부는 NLD가 부정선거했다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국제 정세가 미얀마의 수치에게 유리하지는 않다. 수치가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청소와 민주주의 성숙 등을 방관한 업보 탓이다. 그래도 군부가 미얀마 민주주의를 짓밟는 것을 국제사회가 용인할 수 있을까 싶다.

bsnim@seoul.co.kr
2021-02-0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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