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화국 시절, 나는 나 자신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내 혀에는 밧줄이 칭칭 묶여 있었다. 의지대로 말한다는 것은 박정희 치하에서는 곧장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배자가 원하지 않는 말은 모두 악의 언어로 처단되었다. 정치적 자유란 특히 말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했고, 독재자들은 죽거나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는 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재자 입 속의 혀처럼 굴며, 독재자의 편에 서서, 모든 말의 자유를 억압했던 세력이, 사람들이 죽어 가며 얻어낸 말의 자유를 한껏 누리며, 다시 말을 억압하고 있다. 그들은 다시 박정희의 재갈을 들고 위협을 가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법을 연일 언론이 문제삼고 있다. 참견 수준이 아니라, 가히 억압이라 할 만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좀더 계산된 어법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외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질적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서민이기 때문에 서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실사적 층위에서 살펴보면 그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매우 섬세하게 분절되어 있다. 다만 형용사적 층위에서 매끈한 포장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언론은 그 부분만을 물고 늘어져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한다. 그리고 재갈을 씌우려 든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라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금와왕에게서 탈출한다. 그의 재능을 시기했던 금와왕의 적자들은 사생아인 주몽(사실은 빛으로 잉태된)을 제거해야 한다고 금와왕에게 계속 속살댄다. 그들의 성화에 떠다밀린 금와는 주몽을 시험하기로 하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한다. 영리한 주몽은 금와왕의 준마의 혀에 바늘을 찔러 먹지 못하게 만들고, 신통치 않은 말은 잘 먹여 통통하게 키운다. 금와는 만족하여 통통한 말은 자기가 가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준다. 주몽은 혀에 바늘을 꽂아두었던 바로 그 준마를 타고 탈출한다. 주몽이 바늘을 꽂았던 그 준마의 혀는 주몽이 금와왕 앞에서 현명하게 감추었던 주몽 자신의 언어는 아니었을까?
정신분석학자는 그 혀가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장면은 주몽이 원초 부성을 극복하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의 문제에 민감한 내 눈은 ‘혀’를 언어로 읽는다. 그 해석은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충돌하지 않는다. 결국, 주몽은 아버지의 원리를 드러내는 언어를 극복했다는 해석이 되므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다른 장면이 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중매 절차’ 없이 빛의 신 해모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고,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그녀의 입을 좌우로 잡아당겨 3척으로 늘인 다음 우발수 물에 빠뜨린다. 금와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세 번 자르고 나자, 그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화를 억압했던 숫자 3은 대표적인 남성성의 숫자이다. 하백은 왜 하필 유화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벌을 내렸을까? 그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 대통령이 주몽의 방식에서 힌트를 얻었으면 한다. 용(用)은 억압자의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체(體) 안에는 미래의 가치를 담보하는 혁명성을 보존하기.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쓸 때 사용했던 방법. 그러나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매끈한 어법을 사용했다면 이번에는 “진정성이 없다”,“인간미가 없다”며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들 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노 대통령의 말이 문제되는 진정한 이유이다. 대한민국의 언어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말의 폭군들이 3공화국 뒤에 서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김정란 상지대 교수 시인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했고, 독재자들은 죽거나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는 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재자 입 속의 혀처럼 굴며, 독재자의 편에 서서, 모든 말의 자유를 억압했던 세력이, 사람들이 죽어 가며 얻어낸 말의 자유를 한껏 누리며, 다시 말을 억압하고 있다. 그들은 다시 박정희의 재갈을 들고 위협을 가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어법을 연일 언론이 문제삼고 있다. 참견 수준이 아니라, 가히 억압이라 할 만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좀더 계산된 어법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외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질적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서민이기 때문에 서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실사적 층위에서 살펴보면 그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매우 섬세하게 분절되어 있다. 다만 형용사적 층위에서 매끈한 포장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언론은 그 부분만을 물고 늘어져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한다. 그리고 재갈을 씌우려 든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라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금와왕에게서 탈출한다. 그의 재능을 시기했던 금와왕의 적자들은 사생아인 주몽(사실은 빛으로 잉태된)을 제거해야 한다고 금와왕에게 계속 속살댄다. 그들의 성화에 떠다밀린 금와는 주몽을 시험하기로 하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한다. 영리한 주몽은 금와왕의 준마의 혀에 바늘을 찔러 먹지 못하게 만들고, 신통치 않은 말은 잘 먹여 통통하게 키운다. 금와는 만족하여 통통한 말은 자기가 가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준다. 주몽은 혀에 바늘을 꽂아두었던 바로 그 준마를 타고 탈출한다. 주몽이 바늘을 꽂았던 그 준마의 혀는 주몽이 금와왕 앞에서 현명하게 감추었던 주몽 자신의 언어는 아니었을까?
정신분석학자는 그 혀가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장면은 주몽이 원초 부성을 극복하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의 문제에 민감한 내 눈은 ‘혀’를 언어로 읽는다. 그 해석은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충돌하지 않는다. 결국, 주몽은 아버지의 원리를 드러내는 언어를 극복했다는 해석이 되므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다른 장면이 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중매 절차’ 없이 빛의 신 해모수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고,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그녀의 입을 좌우로 잡아당겨 3척으로 늘인 다음 우발수 물에 빠뜨린다. 금와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세 번 자르고 나자, 그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화를 억압했던 숫자 3은 대표적인 남성성의 숫자이다. 하백은 왜 하필 유화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벌을 내렸을까? 그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 대통령이 주몽의 방식에서 힌트를 얻었으면 한다. 용(用)은 억압자의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체(體) 안에는 미래의 가치를 담보하는 혁명성을 보존하기.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쓸 때 사용했던 방법. 그러나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매끈한 어법을 사용했다면 이번에는 “진정성이 없다”,“인간미가 없다”며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들 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노 대통령의 말이 문제되는 진정한 이유이다. 대한민국의 언어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말의 폭군들이 3공화국 뒤에 서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김정란 상지대 교수 시인
2007-01-1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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