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그림자 놀이’에 스러지는 인문학/김정란 상지대 교수 시인

[열린세상] ‘그림자 놀이’에 스러지는 인문학/김정란 상지대 교수 시인

입력 2006-10-03 00:00
수정 200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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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사회에 요청하고 있다. 고려대 인문학 교수들의 선언에 이어 전국 80여개 대학장들이 인문학을 살릴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의 마련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사이 간간이 터져나오던 인문학자들의 비명이 한데 모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공계의 위기’에 관한 담론은 자주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가 대대적으로 이슈화된 적은 없었다.‘이공계의 위기’가 논의될 때마다 인문학자들은 속으로 조용히 삭일 뿐이었다.‘어쨌든 그건 이야기라도 되는구나. 인문학은 아예 그조차도 못되는구나.’라고.

나는 한국 사회에 등록되기 시작한 ‘이공계의 위기’나 ‘인문학의 위기’ 모두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것을 돈을 만들어내는 물질적 성과 위주로 판단하면서 그 기초를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며, 결국 지속적인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왔다. 지속적인 경쟁력은 무엇보다 기초적인 실력에서 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문학 위기의 일단은 분명히 문명적인 것이다. 세계는 아주 빠른 속도로 인문학을 내다 버리고 있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현실적 결과로만 판단하는 추세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혜로운 눈은 현상의 표층 아래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다른 힘을 헤아린다. 지혜로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표층 아래의 흐름을 현상과 함께 헤아리고 미래를 준비한다. 현상만을 좇으면, 결국 그 공동체는 그림자 놀이만을 하다가 만다. 그 공동체는 진정으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는 아주 기이한 현상을 보인다. 초라한 인문학의 이면에는 문화의 기이한 버블 현상이 있는 것이다. 인문학은 문화의 물줄기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문화상품이라는 최종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수원은 말라 가는데, 하류에서는 지금 물놀이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분수를 만들어서 멋지게 공중에 쏘아 올리고, 그 위에 배를 띄우고 신나게 놀고 있다.

인문학이 지금처럼 위기상황에 몰리게 된 데에는 물론 인문학자들의 잘못도 있다. 그들은 대중과의 소통에 게을렀고, 대학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 갇혀 세상에 벼락이 치든 말든 나 몰라라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에게만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인문학은 성숙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국가 전체 차원에서 큰 틀의 철학을 정립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 막바로 시장으로 떠밀어 넣으면 인문학은 고사해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처럼 근대의 경험이 짧고, 그나마도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서구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연습한 것을 우리는 몇 배로 축약해서 빠르게 그리고 집약적으로 치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란의 덩어리 그 자체이다. 인문학은 결국 역사적 경험의 분절과 연관되어 있다. 현상의 차원에서 문화 상품들이 그때그때 대중의 느낌과 경험을 양식화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인문학이 그 현상적 경험들을 역사적 경험과의 관계 안에서 제대로 자리잡아 주지 않으면 그것은 늘상 임시수용소에서의 삶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매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초를 마련한다는 발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건강한 정신적 몸 만들기 같은 근본적인 플랜이 있어야 한다. 대증적 요법으로는 시간 안에서 버티는 작업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리고 그 얇은 시간에 대한 경험으로는 미래의 강한 공동체를 약속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우연의 바람 안에서 정신없이 흔들려버릴 것이므로.



김정란 상지대 교수 시인
2006-10-0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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