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잘 날기 위해서는 원심력을 최대화할 좌우 날개와 구심력을 최대화할 몸통이 다 건강해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대안이 제기되지만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어렵지 않게 결론에 다다라 통합을 이루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사회가 그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언론이 존재하되, 기간 언론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사회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언론 구조는 이런 이상적인 모형과는 거리가 멀다.
주류 신문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기보다 반(反) 진보의 기수가 되어 있다. 기간 방송은 정권이 바뀌면 언제나 때맞춰 바뀔 개연성 위에 존재한다.
주류 언론에 대한 대중적 불만 덕분에 급성장한 인터넷 매체는 객관성·균형성·공정성이라는 전통적인 언론 규범조차 무시하며 특정 정파를 편들고 있다. 이밖에도 여러 요인이 작동해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화한 투기장(鬪技場)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 정파적이고, 공론장이 싸움판이 되었다면 그 원인은 사실은 대중이 제공하고 있다. 대중이 정파성에 함몰되어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언론에만 박수를 보낸다. 대중은 정파적 이해관계가 다른 언론이나 견해에는 아예 귀를 막고 산다.
이런 경향은 지식인 사회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져 보인다. 겉으로 중립적이고 고결해 보이는 분들과도 정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10분도 못 되어 서로 얼굴을 붉히기 십상이다. 그럴 때면, 대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싸움을 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던 젊은 시절의 부부생활이 생각나 씁쓸해진다.
흔히 민주주의가 천민성을 극복하려면 숙의 민주주의(熟議 民主主義)로 이행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의제(agenda)에 대해 차분하게 토론을 펴 결론을 찾는 그런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숙의를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지성인마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감정을 감추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품격있는 숙의를 이끌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제라도 사회는 사상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언론이 좌우로 나뉘어 활기차게 제 주장을 펴되 스스로 품격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주류 언론은 그 열외에 비켜서서 통합의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여러 종류의 언론이 함께 사는 길이며, 우리 사회가 품격을 갖추어 숙의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전제 조건이다.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것은 주류 언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류 언론은 어느 이데올로기의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론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교과서로 돌아가자면, 공론장을 객관적이고 균형있고 공정하게 관리하여 바람직한 공론을 창출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이 주류 언론의 본령이다.
이번 지자체 선거를 분석하면서 어느 주류 신문은 “20대가 이념코드를 버렸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렇다면 이제 주류 언론도 냉전적 이념코드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주류 매체의 언론자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중을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란 자기 주장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권리가 아니다. 그들의 자유는 공중의 알 권리, 공중이 다양한 의견을 들을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주류 매체 언론인이 공중을 위해 봉사하고, 주류 매체가 날개언론이 아닌 몸통언론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역동적이고도 품격있는 사회로 이행할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사회가 그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언론이 존재하되, 기간 언론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사회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언론 구조는 이런 이상적인 모형과는 거리가 멀다.
주류 신문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기보다 반(反) 진보의 기수가 되어 있다. 기간 방송은 정권이 바뀌면 언제나 때맞춰 바뀔 개연성 위에 존재한다.
주류 언론에 대한 대중적 불만 덕분에 급성장한 인터넷 매체는 객관성·균형성·공정성이라는 전통적인 언론 규범조차 무시하며 특정 정파를 편들고 있다. 이밖에도 여러 요인이 작동해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화한 투기장(鬪技場)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 정파적이고, 공론장이 싸움판이 되었다면 그 원인은 사실은 대중이 제공하고 있다. 대중이 정파성에 함몰되어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언론에만 박수를 보낸다. 대중은 정파적 이해관계가 다른 언론이나 견해에는 아예 귀를 막고 산다.
이런 경향은 지식인 사회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져 보인다. 겉으로 중립적이고 고결해 보이는 분들과도 정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10분도 못 되어 서로 얼굴을 붉히기 십상이다. 그럴 때면, 대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싸움을 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던 젊은 시절의 부부생활이 생각나 씁쓸해진다.
흔히 민주주의가 천민성을 극복하려면 숙의 민주주의(熟議 民主主義)로 이행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의제(agenda)에 대해 차분하게 토론을 펴 결론을 찾는 그런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숙의를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지성인마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감정을 감추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품격있는 숙의를 이끌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제라도 사회는 사상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언론이 좌우로 나뉘어 활기차게 제 주장을 펴되 스스로 품격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주류 언론은 그 열외에 비켜서서 통합의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여러 종류의 언론이 함께 사는 길이며, 우리 사회가 품격을 갖추어 숙의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전제 조건이다.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것은 주류 언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주류 언론은 어느 이데올로기의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론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교과서로 돌아가자면, 공론장을 객관적이고 균형있고 공정하게 관리하여 바람직한 공론을 창출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이 주류 언론의 본령이다.
이번 지자체 선거를 분석하면서 어느 주류 신문은 “20대가 이념코드를 버렸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렇다면 이제 주류 언론도 냉전적 이념코드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주류 매체의 언론자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중을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란 자기 주장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권리가 아니다. 그들의 자유는 공중의 알 권리, 공중이 다양한 의견을 들을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주류 매체 언론인이 공중을 위해 봉사하고, 주류 매체가 날개언론이 아닌 몸통언론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역동적이고도 품격있는 사회로 이행할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 교수
2006-06-1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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