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가 벌써 기말고사를 치르기 시작하면서 여름방학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즈음이면 학생들에게 방학 때 뭘 할 거냐고 묻는다.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학생, 배낭여행을 하겠다는 학생, 학비를 벌겠다는 학생 등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입을 모아 “머리를 잘라 돈을 모아서라도 책을 읽겠다.”고 웃으면서 큰 소리로 대답한다. 학생들 가르치는 몇 년 동안, 방학을 맞이할 때마다, 돈이 없으면 머리를 잘라 팔아서라도 문학작품을 사서 읽으라고 다그친 것이 익히 소문이 난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책을 읽겠다는 우리 학생들이 너무 대견스럽다.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보면, 거의 모든 갈매기들이 그저 먹고 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유독 ‘조너선’만이 새로운 가치 있는 삶을 찾아 끝없이 비상하면서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조너선’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조너선’은 그런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획득한 새로운 가치를 동료 갈매기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학생들에게 방학 때 빈둥거리면서 놀지 말고, 도서관에 틀어 박혀 비지땀을 흘리면서 책을 읽고 짬을 내 학비도 벌라는 이유는 그들을 조너선같은 인물로 키우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일평생 철저히 속물화된 삶을 살아간다. 속물적 인간인 마르셀은, 물욕에만 사로잡힌 당대의 타락한 귀족들을 찬미하면서 그들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는 그토록 찬양하던 이들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고, 진정 가치있는 삶, 즉 인간다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적인 삶을 갈망한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 속물적인 삶을 ‘잃어버린 삶’으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되찾는 삶’으로 명명하고 있다. 우리들 주변에는 속물적인 이도 있고,‘조너선’같은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조너선’같은 이가 드문 것은 사회 자체가 부귀영화와 출세만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하려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속물화되어 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남이 고급 승용차를 타면 자신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하고, 남이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도 그런 옷을 입고 싶어 하고, 남이 화려한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을 우아하게 먹으면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거의 대부분의 욕망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일생은 그런 욕망에 휘둘리면서 끝이 날 수도 있다. 아니, 먼 훗날 그런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속물화된 삶이라는 것을 통절히 뉘우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오지 않은 길, 곧 ‘가지 않은 길’에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길로 돌아가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 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는 자신의 자리에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늘 ‘되찾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지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의 삶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의 핵심요소 중 하나에 좋은 책, 특히 훌륭한 문학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어보면 대번에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가끔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해마다 여름은 늘 우리 곁을 찾아오지만,2005년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생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올해 여름, 우리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마르셀’처럼 살지 말고,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조너선’처럼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마르셀’이 가고 싶어 했지만 그러나 ‘가지 못한 그 길’이 학생들에게는 ‘언제든 갈 수 있는 길’이자, 나아가 ‘지금 현재 가고 있는 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보면, 거의 모든 갈매기들이 그저 먹고 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유독 ‘조너선’만이 새로운 가치 있는 삶을 찾아 끝없이 비상하면서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조너선’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조너선’은 그런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획득한 새로운 가치를 동료 갈매기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학생들에게 방학 때 빈둥거리면서 놀지 말고, 도서관에 틀어 박혀 비지땀을 흘리면서 책을 읽고 짬을 내 학비도 벌라는 이유는 그들을 조너선같은 인물로 키우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일평생 철저히 속물화된 삶을 살아간다. 속물적 인간인 마르셀은, 물욕에만 사로잡힌 당대의 타락한 귀족들을 찬미하면서 그들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는 그토록 찬양하던 이들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고, 진정 가치있는 삶, 즉 인간다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주체적인 삶을 갈망한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 속물적인 삶을 ‘잃어버린 삶’으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되찾는 삶’으로 명명하고 있다. 우리들 주변에는 속물적인 이도 있고,‘조너선’같은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조너선’같은 이가 드문 것은 사회 자체가 부귀영화와 출세만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하려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속물화되어 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남이 고급 승용차를 타면 자신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하고, 남이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도 그런 옷을 입고 싶어 하고, 남이 화려한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을 우아하게 먹으면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거의 대부분의 욕망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네 일생은 그런 욕망에 휘둘리면서 끝이 날 수도 있다. 아니, 먼 훗날 그런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걸어온 길이 속물화된 삶이라는 것을 통절히 뉘우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오지 않은 길, 곧 ‘가지 않은 길’에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길로 돌아가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 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는 자신의 자리에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늘 ‘되찾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갈망과 지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의 삶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의 핵심요소 중 하나에 좋은 책, 특히 훌륭한 문학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어보면 대번에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가끔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해마다 여름은 늘 우리 곁을 찾아오지만,2005년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생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올해 여름, 우리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더라도 ‘마르셀’처럼 살지 말고,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조너선’처럼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마르셀’이 가고 싶어 했지만 그러나 ‘가지 못한 그 길’이 학생들에게는 ‘언제든 갈 수 있는 길’이자, 나아가 ‘지금 현재 가고 있는 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2005-06-0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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