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낱잔 술/ 우득정 논설위원

[씨줄날줄] 낱잔 술/ 우득정 논설위원

입력 2004-04-10 00:00
수정 2004-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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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기업 간부인 L군.약 30년 전 그의 최대 도락은 막걸리 한 사발과 한 개비 담배였다.밤 10시쯤이면 혼자 하숙집을 슬그머니 빠져 나가 시장 모퉁이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친 뒤 좌판에서 산 개비 담배를 물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돌아오곤 했다.아마도 청자 담배 한갑 값인 100원 남짓 들었을 것이다.

대학 2학년 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그의 발길이 시장 초입의 다방으로 바뀌었다.도라지 위스키에 홍차를 눈곱만큼 섞은 ‘위티’로 갑자기 생활수준이 급상승했다.아르바이트로 주머니 사정이 좀 나아졌다는 게 L군의 주장이었지만 다방 ‘레지’와 눈이 맞았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이따금 하숙집 동료들을 다방으로 초청해 ‘레지’를 옆자리에 앉힌 채 ‘위티’ 한잔씩을 돌렸으니 말이다.그러곤 다소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자세를 잡으며 ‘위스키에 맛을 붙이니 막걸리는 못 먹겠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4학년이 되자 그는 하숙집에서 가장 먼저 취업으로 방향을 정했다.낱잔이 아니라 위스키 병나발을 불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선언했다.몇년 전부터 위스키 대신 포도주로 바꿨지만 L군은 자신의 다짐을 확인이라도 하듯 20년 가까이 줄기차게 위스키 병나발을 불었다.

이처럼 궁상과 궁핍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낱잔 술’과 ‘개비 담배’가 다시 등장했다고 한다.소주 한잔에 400원이라던가.두홉들이 소주 한병에 7잔 반이 나오니 한병에 3000원인 셈이다.예전에는 낱잔 술과 개비 담배의 단골 손님이 날품팔이,도회지로 유학온 대학생이었다면 요즘은 직장에서 떨려난 50,60대 중·노년층이란다.2∼3명이 무리지어 해질 녘까지 애꿎은 산비탈만 헤집고 다니다 김치를 안주삼아 소주 한병을 입에 털어넣다가 부족하면 낱잔으로 한,두잔 더 시켜 먹는다는 것이다.30년 전의 낱잔 술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지만 지금의 낱잔 술은 등산 하행길 실직자의 발걸음마냥 천근 만근 가슴을 짓누른다.

지난해부터 한잔에 5000원 하는 폭탄주 전문점,한잔에 1만∼2만원 하는 포도주 전문점이 생겨났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취하는 것은 마찬가지라지만 400원짜리 소주 낱잔을 마시는 인생에게 이러한 풍경이 어떻게 비칠까.

우득정 논설위원˝

2004-04-10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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