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중일, ‘동아시아 패러독스’ 극복을/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정재정의 독사만평] 한중일, ‘동아시아 패러독스’ 극복을/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입력 2022-10-23 20:00
수정 2022-10-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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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 교류·왕래 크게 늘었으나
혐오와 경멸, 갈등 더욱 깊어져
영토·역사·안보 갈등이 증오 키워
화해·공생 위한 공동연구 지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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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박근혜 정부 때 잠깐이나마 ‘동아시아 패러독스’라는 말이 화두에 올랐었다. 당시 정부는 한중일 사이에 물자교역·인간왕래·문화교류 등이 증대하면 서로 이해·존중이 촉진돼 우호·협력이 진전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혐오·경멸이 확산돼 갈등·대립이 심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실제로 2016년 삼국 간 무역액은 5253억 달러, 방문객은 2593만명으로, 10년 전보다 배 이상 늘었는데 호감도는 한국과 일본이 12%, 일본과 중국은 11%, 한국과 중국은 33%에 그치며 큰 폭으로 나빠졌다. 박 전 대통령은 이런 현상을 ‘동아시아 패러독스’라 부르고, 그 원인을 역사인식의 충돌에서 찾아 삼국이 함께 교과서를 편찬해 사용하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동아시아 패러독스’는 더 심해졌다. 2018년 한중일의 상호 무역액은 1조 3980억 달러, 방문객은 3050만명으로 크게 늘었는데, 호감도는 한국과 중국조차도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처럼 10%대로 추락했다. 물자·인간·문화 교류가 아무리 왕성하더라도 영토분쟁·역사갈등·안보대립이 자주 발생하면 국민감정은 더 악화된다는 역설이 다시 증명된 셈이었다. 한중 수교 30년, 중일 수교 50년을 맞은 올해 ‘동아시아 패러독스’는 더욱 심해져 각국 수뇌는 기념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2018년 현재 세계에서 한중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20.7%, 국민총생산 23.6%, 무역액 18.7%에 이른다. 삼국이 이렇게 막중한 위상을 차지하고 상호 의존이 심대한데도 불구하고 국민 대다수가 서로 싫어하고 미워하며, 국가마저 이에 편승해 충돌을 되풀이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하루빨리 ‘동아시아 패러독스’에서 벗어나는 게 삼국은 물론 세계의 평화·번영에도 도움이 된다.

다행히 한국은 매년 국제교류재단의 후원 아래 ‘한일포럼’ ‘한중포럼’ 등을 개최해 상호 관계와 현안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그렇지만 국민 사이의 감정 충돌, 곧 정체성 싸움은 주로 역사·문화 갈등에서 비롯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동아시아 패러독스’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한중일 상호 간의 공동연구나 집단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필자 등에게 부탁해 2018∼19년 한중일의 역사학자·정치학자 40여명으로 ‘역사화해포럼’을 구성해 활동한 것이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역사화해포럼’은 2020년에 ‘역사화해를 위한 한일대화-역사편’, ‘역사화해를 위한 한일대화-정치편’, ‘한중 역사인식의 공유’,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중 관계의 모색’을 출간하고 임무를 마쳤다. 짧은 기간 효율적 운영으로 훌륭한 성과는 거두었는데도 ‘동아시아 패러독스’의 광풍 속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금 동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변동과 불안에 휩싸여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의 전쟁 위험성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런 때일수록 한중일은 끓어오르는 민족주의·애국주의가 상대국에 대한 적개심·증오심으로 폭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여기에 불쏘시개 노릇을 하는 역사·문화 갈등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자들의 공동연구·집단대화가 꼭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그루터기를 갖추고 노하우도 축적하고 있어 이를 선도하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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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연구자들은 원래 개성이 강한 데다 얽매이기를 싫어해 ‘화해’ ‘공생’ 등의 목표를 내건 학술활동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정부가 권유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공동연구·집단대화를 조직하기 어렵고 간신히 시작했더라도 장기간 지속할 수 없다. 한중일에서 새로 등장한 정부가 서로 ‘화해’ ‘공생’을 위한 공동연구·집단대화를 추진해 ‘동아시아 패러독스’라는 덫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2022-10-24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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