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사회면] 무즙으로 감투도 벗긴다고?/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무즙으로 감투도 벗긴다고?/손성진 논설고문

손성진 기자
입력 2019-07-21 17:40
수정 2019-07-22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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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즙엿 먹어 보라’고 외치고 있는 학부모들의 사진과 기사(동아일보 1964년 12월 22일자).
‘무즙엿 먹어 보라’고 외치고 있는 학부모들의 사진과 기사(동아일보 1964년 12월 22일자).
1965년 전기 중학교 입학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엿을 만드는 순서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는데 학부모들은 ‘무즙’도 될 수 있다며 들고일어났다. 학부모들은 집단 농성을 벌이며 반발했다. 학부모들의 항의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자연 교과서에 “디아스타제는 엿기름이나 침, 무즙에도 들어 있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 당국은 정답은 디아스타제 하나라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K교육감은 “무즙으로 엿이 된다면 떨어진 학생들을 구제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학부모들은 직접 솥단지에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위원회로 몰려가 “무즙엿 좀 먹어 보라”고 외쳤다. 서울시교위는 국립과학연구소에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는지 검증을 의뢰했지만 딱 떨어지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그해 2월 25일 무즙을 정답으로 써낸 학생 38명이 ‘입학시험 합격자 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소송이 진행되던 도중 학부모들은 교육감의 개인 집 안방까지 들어가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무즙으로 만들었다는 엿을 교육위원회 담벼락에 붙여 놓기도 했다. 서울고법 특별재판부는 다음달 30일 “무즙도 정답”이라는 판결을 내려 학부모들의 손을 들어 줬다. 소송을 제기한 학생들은 경기중(30명), 서울중(4명), 경복중(3명), 경기여중(1명)에 정원 외로 추가 입학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더 커졌다. ‘무즙 학생’들의 전입학을 틈타 경기중 4명, 경복중 11명 등 특권층 자제 15명이 부정 입학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권층 중에는 청와대 비서관 2명과 한전 사장도 포함돼 있었다. 대통령의 엄단 지시에 따라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이 해임되고 문교부 차관, 서울시교육감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관가 주변에서는 “무즙으로 엿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감투도 벗긴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무즙을 정답으로 써내고도 소송하지 않은 학생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교육 당국은 그들까지 점수를 조정해 주면 연쇄 이동을 일으켜 학교 행정에 큰 혼란이 따른다며 구제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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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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