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권력’ 메시지 여전해 밋밋한 캐릭터·긴 독백 한계
“눈이 오는군. 오늘은 산에서 자는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늦는고?”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어미가 오지 않는 아들 온달(김수현)을 기다리며 혼잣말을 한다. 허공에는 끝없이 눈발이 날리고, 이윽고 그 위로 조용히 어둠이 내린다.
평강온달 설화에 바탕을 둔 연극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이야기를 쌓아 나가는 대신 핵심적인 대목들을 뚝 떼어내 클로즈업시킨다. 평강이 가상의 인물로만 여겼던 바보 온달을 현실에서 만나는 장면, 평강의 도움으로 장수가 된 온달의 죽음, 그리고 권력암투에 의해 평강마저 목숨을 잃는 파국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바닥과 수십개의 장대로 숲을, 커다란 검은 돌덩이로 가옥을 대신한 상징적인 세트는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신화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2층 객석 양 끝에 자리한 피아노와 드럼, 아쟁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불안한 기운을 사방에 퍼뜨린다.
소설가 최인훈이 1970년대에 발표한 첫 번째 희곡인 이 작품은 평강과 온달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인연과 업(業)을 얘기하는 한편으로 권력의 비극적 속성에 대해 경고한다. 정적을 피해 궁을 빠져나온 평강이 온달을 통해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다가 희생되는 결말이 상징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평강에 비해 온달의 캐릭터가 희미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이 긴 독백으로만 표출된 점 등 몇몇 대목에선 세월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의 주제를 극점까지 몰고 가는 한태숙 연출의 스타일이 이 작품에선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크다.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1644-2603.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009-07-17 2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