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누항 나들이] 딸을 예사로 팔아먹던 옛일이 생각나는 까닭

[신경림 누항 나들이] 딸을 예사로 팔아먹던 옛일이 생각나는 까닭

입력 2009-04-29 00:00
수정 2009-04-29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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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덕이라는 작가를 기억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30~40년대에 주옥 같은 동화와 소설을 쓴 작가이면서도 월북하는 바람에 남쪽에선 잊혀졌고 북쪽에서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남북 문학사에서 다같이 빠져 있는 작가다. 소년시절 그의 중편 ‘군맹(群盲)’을 읽고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동대문 밖 낙산 아래 빈민촌이 무대로 남의 땅에 움막을 짓고 사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이야기인데, 가장 신나는 대목은 딸을 팔아 한밑천 잡으려던 부모 모르게 딸 점숙이 몸값을 미리 챙겨들고 애인인 만성과 함께 줄행랑을 놓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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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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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뒤늦게 안 뒤 동네 이웃 사람들은 허탈하면서도 시원해하는 장면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렇게 딸을 팔아먹는 풍습은 옛날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동인의 단편 ‘감자’의 비극도 주인공 복녀가 무능하고 게으른 늙은이한테 돈 몇 푼에 팔려가면서 비롯된 것이고, 이용악의 시 ‘북쪽’에도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라는 표현으로, 가난하던 시절 국경지대의 우리 조상들이 딸들을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팔아먹기도 했음을 암시한다. 불과 70, 80년 전 우리 현실이지만 여성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고 사법시험에 여성들이 절반을 차지할뿐더러 사관학교에서 수석졸업을 여학생이 예사로 하는 요즘, 상상인들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한데도 뜬금없이 딸 팔아먹던 옛날 얘기를 꺼내는 것은 여성을 학대해서 돈을 챙기는 못된 행태가 자주 뉴스거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로 딸을 팔아먹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고 이 또한 그 비뚤어진 풍습의 변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컨대 등록금을 댈 수 없는 여학생이 고리로 돈을 얻어 썼다가 갚지 못해 업소에 나가 성매매를 하고, 견디다 못한 딸의 고백으로 사실을 안 아버지가 딸을 죽이고 자살을 하는 비극만 해도 그렇다. 고리대금업자는 그 여학생이 어떤 부당한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돈이 급하지만 결국은 고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용, 샤일록식 계약으로 옭아맨 뒤 마침내 성매매까지를 강요해서 그 돈마저 착취한다.

이 현실에서 나는 성을 상품으로 전락시켜 이득을 챙기는 고약한 뚜쟁이들과 함께, 예쁜 딸을 팔아 생존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못난 우리들 옛 아버지들이 생각난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성이라는 성을 돈이나 출세와 연계시키는 후진적 인식이 남아 있다는 점이지만 진정으로 딸을 귀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인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음은 더 따질 필요도 없다. 정말로 딸을 귀하게 생각한다면 남의 딸 또한 귀하게 생각해야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자연 자살의 비극도 그렇다. 무언가 이루어 보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젊은 여성을 그 약점을 이용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거부하지 못하게 한 것이 먼저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약자인 여성을 농락하려는 자들이 범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또한 문제다. 청와대 고위직이 연관된 성접대 스캔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자들이 대체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힘 있는 자들이어서 아무런 처벌도 제재도 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소문이라도 날까 봐 모두들 쉬쉬하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이 소문을 축소하느라고 박연차 게이트가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나는 믿지 않지만 말이다. 진심으로 딸들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는 한, 여성이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여학생이 경찰학교에서 수석을 하는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의 후진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군맹’의 점숙이나 ‘감자’의 복녀가 지금 국민소득 2만달러의 우리나라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니 참으로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 신경림
2009-04-2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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