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다

소리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다

입력 2008-11-08 00:00
수정 2008-11-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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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잡지>를 만드는 문화방송 성우들

문이 닫히자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몸은 꽁꽁 얼어붙었다.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믿음이 생기자 비로소 첫발을 내딛었다.

얼마 전 찾아간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체험하는 전시다. 앞을 보지 못한 채 사물을 구별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한다. 어둠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안내자의 목소리뿐.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실제 시각장애인이다.

문화방송 성우실 박태호 실장(61세)과 첫인사를 나누며 ‘어둠 속의 대화’에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25년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잡지>를 만들고 있는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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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목소리를 가진 얼굴 없는 배우들이 오늘도 그들의 재산인 ‘목소리’를 나누고 있다.
천의 목소리를 가진 얼굴 없는 배우들이 오늘도 그들의 재산인 ‘목소리’를 나누고 있다.


“평생 성우로 살다 보니 목소리에 모든 게 담겨 들립니다. 말하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인지, 마음을 속이고 있는지, 불만이 많은지 등을 귀신같이 알아내죠. 상대적으로 청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은 저희보다 목소리에 더욱 예민하겠죠.”

<소리잡지>는 지난 1983년 9월 <샘터>를 비롯한 교양지 대여섯 권의 좋은 글들을 모아 성우들이 직접 읽어 녹음하면서 탄생했다. 대중 매체의 점자 보급이 어려웠던 때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직원이 아이디어를 내자 인기 만화 <뽀빠이>의 브루터스 역으로 유명한 고故 이영달 씨가 후배들과 적극 동참했다. 박 실장을 비롯한 문화방송 성우들은 지금까지 총 300회 1,300여 시간의 녹음으로 1,200권 분량의 <소리잡지>를 보급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 9월 서울특별시복지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야 그저 늘 하던 대로 목소리 연기를 했을 뿐이고, 정작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복지관 식구들이에요. 없는 살림에 녹음 끝나면 일일이 밥까지 챙겨주며 저희들 뒷바라지를 했으니까요.”

박 실장이 소개한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최현철 팀장(49세)은 매달 6,500여 명의 회원에게 TAPE, CD, MP3, ARS 등의 형태로 제작된 <소리잡지>를 무료로 배포한다. 녹음 방식도 아날로그에서 점차 디지털로 변하는 추세다. 복지 서비스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해야 한다며 앞으로 <소리잡지>도 교양지에서 벗어나 낚시, 음악, 영화 등 전문 잡지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이미 20여 편의 ‘소리영화’까지 제작해 선보인 그가 성우들과 ‘소리’를 만들면서 특별히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보통 천천히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청각이 발달하다 보니 오히려 느리게 읽는 것을 못 참으세요. 전문 성우들은 정확하게 읽으면서도 호흡 조절이 가능해 속도를 낼 수 있지요. 목소리를 바꿔가며 연기하는 것도 일품이고요. 짬을 내서 일반 녹음 봉사자들을 훈련시켜주시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20년 넘게 <샘터>와 함께했던 그는 연재물 중 ‘가족’과 ‘삶의 현장’이 특히 인기라며 살짝 귀띔한다. 현재 ‘가족’은 이영달 씨의 뒤를 이어 중후한 목소리의 성우 김태훈 씨가 전담하고, ‘삶의 현장’은 워낙 걸쭉한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어 한 편의 라디오 드라마 못지않단다.

“좋은 목소리는 그저 남의 마음 아프지 않게 들리는 거예요. 내용을 떠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난 목소리죠.” 이미 환갑을 넘긴 베테랑 성우 박태호 실장이 말하는 좋은 목소리에 대한 철학이다. 사람 몸에서 목소리가 제일 안 늙는다며 힘주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느 작가의 표현대로 고운 무늬를 볼 수 있었다.

취재, 글 이만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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