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행당동 무료 공부방 ‘조이 스터디’
취재, 글 이만근 기자.
“학교 다녀왔습니다.” 짧은 겨울 해를 뒤로 속속 도착한 아이들이 신선영 씨를 보자 꾸벅 인사한다. “꿈을 묻지 않으면 학교가 아니에요.” 그는 단호하다. 외아들 한전이도 초등 과정 이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학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 아이들도 품었다. 오직 내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는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그의 품은 유독 넓어 보인다.
‘배우는 것도 기쁨이요, 가르치는 것도 기쁨’이라는 뜻의 ‘조이 스터디’. 그들의 꿈이 영그는 아홉 평 남짓한 작은 집은 신선영 씨 말마따나 ‘진짜 학교’다. 어수선하게 꽂혀 있는 책들 사이 아이들은 들쭉날쭉 제멋대로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로 기타를 튕기는 아이 옆에 유심히 신문을 보며 기사를 자르고 붙이는 아이가 있고 또 다른 아이는 동화책을 크게 읽는다. 그리고 여느 학생처럼 문제 풀이에 골똘한 아이 옆에는 곤하게 잠을 자는 학생도 있다. 언뜻 산만한 것 같지만 나름 질서도 있다. 옮겨야 할 짐이라도 있어 손이 필요하면 서로 벌떡 일어나 나르기도 하고 나이 많은 오빠 누나들은 동생들을 챙긴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모아 무료로 방과 후 수업을 합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홈스쿨링을 택한 아이들까지 합쳐 삼십여 명이 모였으니 대가족이죠. 엄마는 하나인데.” 한전이는 엄마 덕분에 형제가 늘어 외롭지 않게 자란 셈이다. 미국에서 결혼한 신선영 씨는 한전이가 여섯 살 때 이혼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우리 고유문화에 애착이 컸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데도 큰맘을 먹어야만 했다. 집안 망신 말고 조용히 미국에서나 살라는 가족들의 타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국해 적잖은 나이에 10년 후의 꿈을 위해 상담과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시작한 소년원 봉사는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불화로 마음이 황폐했다. 아무리 좋은 말을 건네도 차갑게 튕겨져 나오는 반응이 허탈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도 이혼하고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다며 솔직하게 얘기하자 그때부터 아이들이 마음을 열더란다. 왜 아이를 버리지 않았느냐는 냉소와 함께.
“아이들이 꿈이 뭔지도 모르고 왜 꿈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게 가장 마음 아팠어요. 제도권 학교는 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보듬기는커녕 오히려 편견의 희생양으로 만들었죠. 무관심 속에 모두를 똑같이 다루기만 하는 교육은 폭력에 가까운 거예요.”
그는 서울의 한 유명 국제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년원 아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얼마 안 가 그의 기억 속에 ‘달동네’로 남아 있던 서울의 행당동을 찾았다. 학교에 적응 못해 갈 곳 없거나 보살피는 어른이 없어 학습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아이들의 엄마이자 선생님을 자처한 것이다. 진짜 자신이 할 일을 찾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초등학교를 나왔는데도 1분이 60초란 것을 모르거나, 구구단을 이해 못해 369게임을 못하는 아이들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죠. 일상을 같이하며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알아가는 게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에요. 그러면 아이들은요 신기하게도 영어, 수학은 하지 말래도 붙잡고 해요.”
올겨울 신선영 씨는 고민이 크다. 동네가 재개발될 예정이라 보금자리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 스무 평 이상 공간을 찾아야 하는데 서울시 지원비로는 턱없다. 그래도 아홉 평 공부방에서는 오늘도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따뜻한 밥 한 끼와 함께할 꿈의 대화가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