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묵자와 양자는 양극의 극단주의적 사상가였다. 같은 상황이라도 엄격한 율법주의로 재단하는 묵자와 자연주의로 낙관적으로 보는 양자와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던 것이다.
같은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가르침을 펴고 있는가 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양자에게는 양포(楊布)라는 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양포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흰옷을 입고 외출하였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 옷이 더럽혀질까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러자 집에서 기르고 있던 개가 양포를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하자 형 양자가 그것을 보고 동생 양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만일 네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있다가 까맣게 해가지고 돌아오면 너 역시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양자의 낙관주의적 무위주의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즉 겉모양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아는 것은 다만 형상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으로 이처럼 겉모양은 쉼 없이 변화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갈 때는 희었는데, 돌아올 때는 검다는 뜻’의 ‘백왕흑귀(白往黑歸)’란 성어가 태어나고 같은 동의어로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양포지구(楊布之狗)’란 성어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라도 묵자에게 가면 그 뜻은 정반대로 달라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묵자는 실에 물들이는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목공(木工) 출신이어서 ‘나무로 솔개를 만들어 날릴 수 있을 만큼의 손재주’가 있었고,‘잠깐 사이에 세치의 나무를 깎아 수레바퀴 빗장을 만들 만큼의 솜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던 묵자.
이처럼 스스로의 손재주와 솜씨로서 자급자족하던 묵자였으므로 자연 저잣거리에서 물감의 실을 염색하는 기술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던 일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염색하는 모습을 바라본 후 묵자는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스승의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던 제자 하나가 ‘어찌하여 실에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슬퍼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탄식한 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색도 없는 실이 파란물감에 물들이면 파란색이 되고, 노란물감에 물들이면 노란색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물감에 따라 실의 색깔도 변하여 매번 다른 색깔을 만드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2005-10-1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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