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상경했던 와룡선생(21일자 열린세상 ‘와룡선생 상경기’ 보도)은 실리를 챙겼지만,명분을 잃었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동안 경성에 사는 왕초에게 맞설 때 내세우던 명분은 선거용일 뿐이고,정작 경성에 가서는 실용주의 외교라는 간판아래 왕초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다 돌아왔다는 것이다.고향 주민들이 보이는 이런 반응은 아마도 그동안 와룡선생이 보여주었던 호기에 비하여 일체의 설명없이 거두절미 변신한 것이 너무도 민망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와룡선생이 아무런 예고없이 신호음의 방향을 불쑥 바꾼 것은 누가 봐도 잘한 것은 아니다.와룡선생 코드의 불안정성에 대하여는 최근 “읍장노릇 못해 먹겠다.”라는 언급에서 절정에 이른 듯한 느낌이다.
왕년의 ‘준비된 읍장’도 돈을 주고 이웃 산간마을 이장과 회담을 했다거나,읍민들의 통합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판국에,이번 읍장은 준비는 고사하고 아예 주민들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그러나 코드 부분에 대하여는 그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코드가 흔들리는 것과 명분을 버린 것은 평가의 대상이 다른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개인차원과 달리 국가가 일정한 명분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은 쉽게 단안을 내릴 수 없는 고난도의 질문이다.
우선 국민은 철학자나 도학자의 집단이 아니고,국가의 수반도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왕인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제아무리 코드가 맞는 인사를 찾아내는 데 귀신같은 와룡선생이라 하더라도 답 아닌 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여 그들을 못 본 척할 수도,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싫더라도 함께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어떤 색깔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집할 수 있겠는가.요행히 그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다 해서,굳이 다른 이름을 갖고 싶다고 버티는 사람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일찍이 라인홀드 니부어는 개인적으로 극히 도덕적인 인간이 집단적으로는 광기와 비합리성 속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역설에 대하여 갈파한 적이 있지만,모든 사람의 욕구와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적 명분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혹 일시적이나마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나 이성과는 거리가 먼 불합리한 도취나 황홀경 따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어떻게 본다면 와룡선생의 고향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경성 왕초의 전쟁 명분,테러범 소탕이라는 구호도 경성 주민들에게 하나의 집단최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종류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와룡선생이 고집했어야 할 국가적 명분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고향 주민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제 우리도 먹고 살만 하니까 왕초에게 할 말은 했어야 했을까.
병자호란 당시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최명길은 과감히 화전책을 주창했고 이를 실현시켰다.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구고삼배(九叩三拜)의 치욕끝에 겨우 사직과 지위를 보전하였다.그러나 정작 우스운 일은 여기부터 시작된다.최명길 덕분에목숨을 보전했던 명분론자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를 매국노,소인배로 폄하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들이 주장하는 신유학이나 대명천자(大明天子)에 대한 충성이 과연 국가적 명분으로 타당한 것이었을까.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꼭 그래야만 고향사람들의 직성이 풀리게 될까.
나라 차원에 있어 윤리적 도덕적 명분이란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며,지도자가 일반 백성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명분은 소박하지만 문자 그대로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생활이 평안하다는 의미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이고,따라서 와룡선생이 경성 왕초앞에서 말을 바꿀 때 국태민안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절대로 명분을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김 형 진 변호사
왕년의 ‘준비된 읍장’도 돈을 주고 이웃 산간마을 이장과 회담을 했다거나,읍민들의 통합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판국에,이번 읍장은 준비는 고사하고 아예 주민들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공부를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그러나 코드 부분에 대하여는 그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코드가 흔들리는 것과 명분을 버린 것은 평가의 대상이 다른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개인차원과 달리 국가가 일정한 명분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은 쉽게 단안을 내릴 수 없는 고난도의 질문이다.
우선 국민은 철학자나 도학자의 집단이 아니고,국가의 수반도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왕인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제아무리 코드가 맞는 인사를 찾아내는 데 귀신같은 와룡선생이라 하더라도 답 아닌 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여 그들을 못 본 척할 수도,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싫더라도 함께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어떤 색깔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집할 수 있겠는가.요행히 그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다 해서,굳이 다른 이름을 갖고 싶다고 버티는 사람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일찍이 라인홀드 니부어는 개인적으로 극히 도덕적인 인간이 집단적으로는 광기와 비합리성 속에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역설에 대하여 갈파한 적이 있지만,모든 사람의 욕구와 바람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적 명분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혹 일시적이나마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나 이성과는 거리가 먼 불합리한 도취나 황홀경 따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어떻게 본다면 와룡선생의 고향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경성 왕초의 전쟁 명분,테러범 소탕이라는 구호도 경성 주민들에게 하나의 집단최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종류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와룡선생이 고집했어야 할 국가적 명분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고향 주민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제 우리도 먹고 살만 하니까 왕초에게 할 말은 했어야 했을까.
병자호란 당시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최명길은 과감히 화전책을 주창했고 이를 실현시켰다.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구고삼배(九叩三拜)의 치욕끝에 겨우 사직과 지위를 보전하였다.그러나 정작 우스운 일은 여기부터 시작된다.최명길 덕분에목숨을 보전했던 명분론자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를 매국노,소인배로 폄하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들이 주장하는 신유학이나 대명천자(大明天子)에 대한 충성이 과연 국가적 명분으로 타당한 것이었을까.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꼭 그래야만 고향사람들의 직성이 풀리게 될까.
나라 차원에 있어 윤리적 도덕적 명분이란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며,지도자가 일반 백성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명분은 소박하지만 문자 그대로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생활이 평안하다는 의미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이고,따라서 와룡선생이 경성 왕초앞에서 말을 바꿀 때 국태민안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절대로 명분을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김 형 진 변호사
2003-05-26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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