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만큼 ‘굵고 짧게’라는 말이 적합한 인물은 없을 듯하다.
채 7년이 못되는 정치생활 중 원내 제1당의 대선후보를 2차례나 따냈고,이기간의 대부분을 총재로 지냈다.누구 못지않은 화려한 정치 경력을 가진 만큼 20일 그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은 명암이 교차했다.
이 후보는 지난 96년 1월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 영광과 파란,회한이 교차하는 정치역정을 걷는다.
몇개월 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선전을 바탕으로 당내 입지를 다진 그는 97년 3월 집권여당의 대표에 오른다.이어 전개되는 ‘7룡’,‘9룡’과의치열한 경선에서 승리하고,정치입문 1년반만에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직을 거머쥐는 ‘신화’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해 12월 실시된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39만여표 차로 패배하고 눈물을 쏟아야 했다.
이 후보는 대선이 끝나고 당 명예총재로 물러났다가 8개월여 뒤 전당대회를 통해 야당총재로 정치 일선에 복귀한다.그는 복귀와 함께 투쟁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이즈음 본격적인 북풍·세풍 수사가 진행되고 당은 심하게 요동친다.그가 보복사정 중단 등을 요구하며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국회는 공전되고 정치는 혼돈에 빠진다.99년에도 역시 언론사 세무조사 문건과 도청문제등으로 이회창은 내내 김대중 정권과 대척점에 선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회창 후보의 정치 인생에 또하나의 전환점이 된다.그는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신상우(辛相佑) 등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킨다.
그는 이때 정치쇄신에 대한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이회창식 리더십’을 부각시켰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압승했다.133석을 확보하며 원내1당의 총재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2000년 5월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된 뒤로 이 후보는 비교적 순항한다.안기부자금 유입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도리어 한나라당을 더욱 결집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뿐이었다.‘제왕적 총재’라는 말이 나올만큼 그는 확고한 지위를 이룩했고,‘이회창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라는 얘기까지 회자되기도 했다.올 봄은 이회창 후보에게 최대의 시련기였다.민주당이 대통령후보 선출을위한 국민경선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변화 욕구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그와 당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지난 4년간 40%대를상회해온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경선도 받아들이고 총재직도 내놓는 등 뒤늦게 민심을 따라잡으려 했지만 한번 추락한 지지율은 오를기미가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낮은 자세로 서민 속으로’ 파고들면서 흙묻은 오이를 먹고,시장통에 주저앉아 막걸리도 마셨으며 김밥이나,도시락,설렁탕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지지율 1위를 탈환했으나 ‘정몽준’이라는 암초를 만난다.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5년을 준비한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선거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5년전 김대중 후보를 추격했듯,선거전 내내 노무현 후보를 뒤쫓으며 막판역전을 노렸으나 끝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이지운기자 jj@
채 7년이 못되는 정치생활 중 원내 제1당의 대선후보를 2차례나 따냈고,이기간의 대부분을 총재로 지냈다.누구 못지않은 화려한 정치 경력을 가진 만큼 20일 그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은 명암이 교차했다.
이 후보는 지난 96년 1월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 영광과 파란,회한이 교차하는 정치역정을 걷는다.
몇개월 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선전을 바탕으로 당내 입지를 다진 그는 97년 3월 집권여당의 대표에 오른다.이어 전개되는 ‘7룡’,‘9룡’과의치열한 경선에서 승리하고,정치입문 1년반만에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직을 거머쥐는 ‘신화’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해 12월 실시된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39만여표 차로 패배하고 눈물을 쏟아야 했다.
이 후보는 대선이 끝나고 당 명예총재로 물러났다가 8개월여 뒤 전당대회를 통해 야당총재로 정치 일선에 복귀한다.그는 복귀와 함께 투쟁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이즈음 본격적인 북풍·세풍 수사가 진행되고 당은 심하게 요동친다.그가 보복사정 중단 등을 요구하며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국회는 공전되고 정치는 혼돈에 빠진다.99년에도 역시 언론사 세무조사 문건과 도청문제등으로 이회창은 내내 김대중 정권과 대척점에 선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회창 후보의 정치 인생에 또하나의 전환점이 된다.그는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신상우(辛相佑) 등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킨다.
그는 이때 정치쇄신에 대한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이회창식 리더십’을 부각시켰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압승했다.133석을 확보하며 원내1당의 총재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2000년 5월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선출된 뒤로 이 후보는 비교적 순항한다.안기부자금 유입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도리어 한나라당을 더욱 결집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뿐이었다.‘제왕적 총재’라는 말이 나올만큼 그는 확고한 지위를 이룩했고,‘이회창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라는 얘기까지 회자되기도 했다.올 봄은 이회창 후보에게 최대의 시련기였다.민주당이 대통령후보 선출을위한 국민경선을 시작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변화 욕구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그와 당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지난 4년간 40%대를상회해온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졌다.경선도 받아들이고 총재직도 내놓는 등 뒤늦게 민심을 따라잡으려 했지만 한번 추락한 지지율은 오를기미가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낮은 자세로 서민 속으로’ 파고들면서 흙묻은 오이를 먹고,시장통에 주저앉아 막걸리도 마셨으며 김밥이나,도시락,설렁탕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지지율 1위를 탈환했으나 ‘정몽준’이라는 암초를 만난다.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5년을 준비한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선거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5년전 김대중 후보를 추격했듯,선거전 내내 노무현 후보를 뒤쫓으며 막판역전을 노렸으나 끝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이지운기자 jj@
2002-12-2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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