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미국 지식인들의 한숨

[열린세상]미국 지식인들의 한숨

이성형 기자 기자
입력 2002-12-12 00:00
수정 2002-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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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강한 나라의 ‘미국여자'인 것이 부끄럽다.허영에 대한 숭배도,매스컴도,무기도,할리우드 영화도,폭력도,타국의 문화를 무너뜨리는 대중문화도 모두 싫다.

이런 생각을 한 적도,말한 적도 없지만,이젠 차라리 스페인 여자나 이탈리아 여자가 되고 싶다.” 탁월한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손택이 얼마 전에한 말이다.

9·11 테러 사태 이후 미국 사회에는 한편으로는 애국주의 물결이,다른 한편으로는 이 ‘애국주의'의 맹목성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지난 9월19일에는 4천명이 넘는 지식인,예술인,학자,종교인들이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뉴욕 타임스’에 싣기도 했다.

이들은 선과 악이란 이분법에 자리 잡은 복수심의 문화가 확산되는데 우려를 표시하고,부시 행정부가 “전미국인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작가 고어 비달,영화감독 로버트 알트만,배우 수전 서랜던,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등이 여기에 서명했다.그렇지만 미국 사회에 대한 반응이 큰 것 같지는 않다.

‘미국 문화의 몰락’을 쓴 모리스 버만은 아찔한 수준으로 부시를 비판한다.“부시는 지적인 사람이 아니다.이분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은 지적 능력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부시는 카메라나 기자들 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문법적 실수 없이 연설 한번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만큼 바보다.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스크린을 읽는 일인데,이때 발음되는 영어만큼은 정확하다.” “부시 같은 사람은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쳐다보지도 않는다.클린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옥스퍼드를 다녔던 지적인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반적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은 대단히 무식하다.그들은 지식인들에게 관심도 없다.” 버만은 최고급의 지식인 집단이 인구 다수와는괴리된 채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기에,미국 문화도,제국의 영광도 로마제국의 쇠락처럼 이제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버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굴러간다.그것을 굴리는한 축의 힘은 월스트리트이다.며칠 전 오닐이 재무장관에서 밀려났다.부시의 감세 정책을시큰둥하게 받아들였고,이라크 전비가 2천억 달러나 든다고 해서 대로를 샀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의 사람들도 오닐에게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함께 물러난 백악관 경제수석 보좌관 후임에는 아예 골드만 삭스의 전 회장이 영입됐다.

부시 행정부를 굴리는 또 다른 한 축은 애국주의에 힘입은 망각의 힘이다.얼마 전에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헨리 키신저가 복귀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재직 시절에 저지른 인권관련 범죄로 피노체트처럼 기소를 당할까봐 중남미 여행마저 할 수 없었던 ‘도망자' 신세였다.유럽과 중남미의 인권단체들은 그에게 준 노벨평화상을 회수해야 한다는 캠페인마저 벌이고 있었다.닉슨과 포드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과 국가안보 자문역을 역임했던 그는 캄보디아 비밀공습,칠레의 아옌데 정부 전복을 지휘했다.부시 대통령은 아마도 예방적 차원의 전격전에 익숙한 그에게 이라크 개전과 향후 중동 전략을 짜는 복잡한 계산을 맡긴 듯하다.

키신저 이전에도 망각의 덕을 본 사람들이 있다.이달 초 펜타곤 정보분야책임자로 임명된 존 포인덱스터 제독은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핵심인물이었다.그는 미국 인질범을 풀어주는 대가로 무기를 판매한다는,레이건대통령 서명이 담긴 문서를 파기했다고 의회 청문회에서 인정했다.무기 판매 대금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콘트라 게릴라 지원에 불법적으로 사용되었다.그의 부하였던 올리버 노스 대령은 문서파기죄로 기소되었지만,지금은 워싱턴 정가의 TV 토크쇼에 일급 출연자로 자주 나온다고 한다.

의회의 청문회를 방해한 죄로 기소되었던,레이건 정부의 엘리어트 에이브럼스 국무부 차관보도 국가안보위원회에 복귀했고,콘트라 지지 프로파간다를총지휘했던 오토 라이시도 국무부 차관보로 일찌감치 영입되었다.

그러니까 이란-콘트라 동문들은 거의 모두 백악관 요직에 기용된 것이다.국민적 망각의 힘에 밀려 그나마 멸종 위기에 있는 미국 지식인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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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형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위원
2002-12-1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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