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팀이 폴란드와 월드컵 본선 경기를 갖던 날,전국은 하루 종일 붉은 티셔츠 물결이었다.많은 젊은이들은 아예 집을 나설 때부터 붉은 티셔츠 차림이었다.붉은색이라는 의미의 ‘Reds’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았다.그저 붉은색 티셔츠면 거칠 게 없다.그리고 전광판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 질펀하게 주저앉아 ‘짝짝짝 대∼한민국’을 연호했다.한자리에 모여 연습한 것도 아니건만 모두가 한 사람의 그림자처럼 율동을 소화해 낸다.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그냥 ‘붉은 악마’라고 부른다.
붉은 악마가 세상의 이목을 끈 것은 4년 전이다.프랑스 월드컵에 어렵게 진출한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참패해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한국축구는 ‘안된다’는 허무주의에 그대로 빠져들었다.바로 그때 관람석에서 야유를 보내던 그들이 ‘축구’에 뛰어들었다.축구 선수보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한국 축구를 함께 안타까워하며 뜨겁게 격려했다.저만치 떨어져 있던 구경꾼들이 자발적인 참여자로 변신했다.뒤에서 손가락질이나 하던 그들이 실천의 주체를 자임하고 나섰다.상대의 허물을 들춰 반사 이익을 챙기던 사회에 강점을 찾아내 키워나가야 한다며 참여와 실천의 시대를 열었다.
붉은 악마는 한국 축구의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방관자가 아니라 스스로 바로 12번째 선수이기 때문이다.이기면 더없이 좋지만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시작하라는 것이다.가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또 가면 될 것 아니냐는 식이다.지목한 감독이나 혹은 특정 선수를 위해 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다.그저 축구가 좋아 축구장을 찾고,길거리에 앉아 응원을 하고,그리고 붉은 티셔츠를 입어 스스럼없이 자기를 밝힌다.비록 그들이 피부색이 다르고,생각이 다르고,정서가 달라도 붉은 티셔츠를 입은 순간만은 축구를 키워드 삼아 하나되어 어울리려 한다.
스스로 내면 세계를 가꿔 가는 그들이기에 하나같이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가 되어 같은 길을 가자고 제안한다.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진출권을 놓고 한국이 일본과 맞붙었을 때였다.한국의 붉은 악마는 일본팀을 향해 응원석 전면에 ‘프랑스에 함께 가자’(Let’sgo to France together)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어디 그뿐인가.한국이 폴란드와 첫 본선 경기를 갖던 날에도 공교롭게도 같이 본선 경기를 치르는 중국과 일본에 ‘16강에 함께 가자.’는 격려를 잊지 않았다.그들은 자기 중심주의 사고의 틀을 공동체 의식으로 승화시켰다.
사회를 바꾸는 새로운 움직임은 한번쯤 역풍을 맞는 법이다.붉은 악마라는 이름을 놓고 말들이 많다.왜 하필이면 ‘붉은’색을 택했느냐고 탓한다.‘악마’도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1983년이었다.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선구권 대회에 출전해 돌풍을 일으키며 4강에 진출하자 당시 중남미 언론들이 붉은 악마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붉은색은 한국 축구 선수 유니폼의 대표적인 색깔일 뿐만 아니라 열정을 암시하는 색이다.악마가 어디 꼭 악마인가.강인하고 지칠 줄 모르는 투지를 압축한 말이 아닌가.실제로 붉은 악마에 대항해 ‘백의 천사’가 급조되기도 했지만 ‘정신’ 없었으니 빛을 볼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붉은 악마는 돌풍과 같아서 손으로는 잡히지 않는다.실체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방관자 의식을 극복한 참여 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이 아닌 바람직한 세계를 추구하는 ‘정신’이 있는 조직이다.그들은 다른 주장이나 견해를 배격하지 않는다.활발한 토론을 통해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도출해 낸다.그러면서도 연예인 등의 팬클럽과 같이 맹목적이지 않다.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참여’라는 시대 정신을 낳은 붉은 악마의 행보가 주목된다.끝내 축구 주위에서 맴돌다 말 것인지 그리고 참여운동을 어떻게 숙성시켜 어떤 모습을 발전시켜 나갈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정인학/ 논설위원chung@
붉은 악마가 세상의 이목을 끈 것은 4년 전이다.프랑스 월드컵에 어렵게 진출한 한국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참패해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한국축구는 ‘안된다’는 허무주의에 그대로 빠져들었다.바로 그때 관람석에서 야유를 보내던 그들이 ‘축구’에 뛰어들었다.축구 선수보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한국 축구를 함께 안타까워하며 뜨겁게 격려했다.저만치 떨어져 있던 구경꾼들이 자발적인 참여자로 변신했다.뒤에서 손가락질이나 하던 그들이 실천의 주체를 자임하고 나섰다.상대의 허물을 들춰 반사 이익을 챙기던 사회에 강점을 찾아내 키워나가야 한다며 참여와 실천의 시대를 열었다.
붉은 악마는 한국 축구의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방관자가 아니라 스스로 바로 12번째 선수이기 때문이다.이기면 더없이 좋지만 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시작하라는 것이다.가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또 가면 될 것 아니냐는 식이다.지목한 감독이나 혹은 특정 선수를 위해 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다.그저 축구가 좋아 축구장을 찾고,길거리에 앉아 응원을 하고,그리고 붉은 티셔츠를 입어 스스럼없이 자기를 밝힌다.비록 그들이 피부색이 다르고,생각이 다르고,정서가 달라도 붉은 티셔츠를 입은 순간만은 축구를 키워드 삼아 하나되어 어울리려 한다.
스스로 내면 세계를 가꿔 가는 그들이기에 하나같이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가 되어 같은 길을 가자고 제안한다.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진출권을 놓고 한국이 일본과 맞붙었을 때였다.한국의 붉은 악마는 일본팀을 향해 응원석 전면에 ‘프랑스에 함께 가자’(Let’sgo to France together)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어디 그뿐인가.한국이 폴란드와 첫 본선 경기를 갖던 날에도 공교롭게도 같이 본선 경기를 치르는 중국과 일본에 ‘16강에 함께 가자.’는 격려를 잊지 않았다.그들은 자기 중심주의 사고의 틀을 공동체 의식으로 승화시켰다.
사회를 바꾸는 새로운 움직임은 한번쯤 역풍을 맞는 법이다.붉은 악마라는 이름을 놓고 말들이 많다.왜 하필이면 ‘붉은’색을 택했느냐고 탓한다.‘악마’도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1983년이었다.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선구권 대회에 출전해 돌풍을 일으키며 4강에 진출하자 당시 중남미 언론들이 붉은 악마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붉은색은 한국 축구 선수 유니폼의 대표적인 색깔일 뿐만 아니라 열정을 암시하는 색이다.악마가 어디 꼭 악마인가.강인하고 지칠 줄 모르는 투지를 압축한 말이 아닌가.실제로 붉은 악마에 대항해 ‘백의 천사’가 급조되기도 했지만 ‘정신’ 없었으니 빛을 볼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붉은 악마는 돌풍과 같아서 손으로는 잡히지 않는다.실체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방관자 의식을 극복한 참여 의식을 바탕으로 현실이 아닌 바람직한 세계를 추구하는 ‘정신’이 있는 조직이다.그들은 다른 주장이나 견해를 배격하지 않는다.활발한 토론을 통해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도출해 낸다.그러면서도 연예인 등의 팬클럽과 같이 맹목적이지 않다.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참여’라는 시대 정신을 낳은 붉은 악마의 행보가 주목된다.끝내 축구 주위에서 맴돌다 말 것인지 그리고 참여운동을 어떻게 숙성시켜 어떤 모습을 발전시켜 나갈지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정인학/ 논설위원chung@
2002-06-0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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