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한풀꺾인 1990년대 새롭게 떠오른 갈등은 인종분쟁이었다.그리고 그 양상은 지구촌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전후 50여년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민족들간의 불화를 다스려온 구유고연방은 소련 붕괴와 함께 유혈 해체의 길로 내동댕이쳐졌다.이 과정에서인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행된 끔찍한 학살극 도미노를 목격해야 했다.
광기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국제사회에도 전혀 새로운 대응논리가 출현했다.인권이 침해될때는 주권국가라 할지라도 국제사회의 도덕적 응징에서 자유로울수 없다.즉 인권이 주권에 앞선다는 새 독트린이었다.이는 미국의주도에 따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 이래 최초로 주권국가에 공습을 감행하는 근거가 됐다.
◆분쟁의 배경=유고연방은 2차대전 직후 연합국 전후처리의 산물로 탄생했다.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등 인종이 판이한 공화국들을 국가로 묶어내기 위해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한 유고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보이보디나 자치주 등을 비롯한각 공화국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그러나 80년 티토의 타계,90년 소련,동독 등의 붕괴로 연대의 끈이 끊어져나가자 공화국마다 독립요구가 거세졌다.유고연방 실질적 패권세력이었던 세르비아인들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됐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유고연방 대통령은 이에 편승,잔혹한 학살극을자행했다.
◆보스니아 내전=91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92년 보스니아 회교집권세력이 각각 독립을 선포함에 따라 이 지역의 소수파로 전락한 세르비아인들은사활을 건 반격에 나섰다.한때 크로아티아의 3분의 1까지 점령했고 보스니아에서는 회교-크로아티아 연합세력에 잔혹한 학살극을 펼치기도 했다.인종청소,강간,약탈 등으로 얼룩진 보스니아 내전은 현대사 최악의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결국 국제사회가 개입했다.나토 및 유엔 등 서방의 중재아래 95년 내전 당사자들끼리 ‘데이튼 협정’이 체결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국 지위와 국경선이 확정됐다.
◆코소보 사태=코소보 독립운동은 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수십여년간 지속돼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코소보 인구의 90%를 차지하면서도 세르비아에 종속된 위치였던 알바니아인들은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선언하고 나왔다.그럴수록 코소보를 자신들의 역사적 성소로 여겨온 세르비아계의 위기감은 높아갔다.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알바니아인들을 살육,추방하는 대규모 ‘인종청소’를 통해 세르비아 국수주의를 자신의 집권연장에 이용했다.
◆미국과 나토의 대응=몇번의 경고에도 불구,학살의 잔학상이 지속되자 미국과 나토는 99년 3월24일 마침내 세르비아에 대공습을 개시한다.나토 50년 역사상 주권국가에 대한 최초의 선제공격으로 기록된 이 78일간의 공습끝에 밀로셰비치는 결국 백기를 들고 유엔 평화유지군 감시하에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귀환을 허용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발칸의 뇌관’밀로셰비치.
정권을 향한 권모술수와 사정없는 인종청소로 ‘발칸의 뇌관’으로 악명을떨쳤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58)대통령.나토공습 패배이후 최대위기에 봉착했던 그는 최근 유고 의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통과됨에따라 또한번 특유의 위기돌파력으로 정치생명 연장의 기회를 갖게 됐다.
1942년 세르비아 중부 산업도시 포자레바츠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가출,부모의 잇단 자살 등으로 극도로 불우했다.64년 공산당에 입당,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대제국 건설’을 표방하는세르비아인들의 국수주의에 편승,민족주의자로 돌변한다.
이후 그는 이민족에 대한 가차없는 차별과 통제정책으로 권력가도를 승승장구한다.코소보 자치권을 빼앗은 89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올랐고 보스니아내세르비아 반군을 전폭지원한 92년 재선됐다.그는 90년대 중반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청소를 가속화,무수한 인명을 무차별 학살해 야당의 거센반발을 샀다.결국 나토의 공습을 불렀고 본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기소된 상태다.
손정숙기자.
*코소보 왜‘피의 聖地’인가.
왜 코소보인가.
한쪽에서는 독립해 나가겠다고,다른쪽에서는 절대 내어줄수 없다고 유혈극을 불사하는 코소보.코소보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대립양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곳이다.
기독교 세르비아 정교도인 슬라브계통의 세르비아와 이슬람권 알바니아계는 공히 이곳을 자신들의 성지(聖地)로 주장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14세기 이곳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정교회 유물 및 건축을 꽃피웠다.때문에 ‘중세의 영광이 서린 땅’을 결코 내어줄수 없다는 입장.그러나 코소보는 이후 500여년간 오스만 투르크 손에 넘어갔고 같은 회교도들인알바니아계가 대량 이주,이번에는 도처에 회교사원을 건립했다.이와 함께 전체의 90%에 이르는 인구구성 등을 들어 알바니아계 역시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한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분리독립 열망은 1918년 코소보가 세르비아 영토로편입되고 46년 구유고연방으로 합병된 이후에도 국제정세가 바뀔때마다 크고작은 유혈극으로 불거져나왔다.결정적으로 89년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대통령이 그간의 자치권마저 박탈함에 따라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현재는 평화유지군이 코소보 자치를 유도하고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민족감정,역사적 배경 때문에 장래를 점치기란 쉽지 않다.
손정숙기자.
*유고 연표.
◆1389년 오스만 투르크,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강점.
◆1946년 구유고연방 탄생,코소보는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이에 편입.
◆1987년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 취임.민족주의정책의 일환으로 코소보 알바니아계 탄압시작.
◆1989년 밀로셰비치,코소보 자치권 강탈.
◆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와의 사이에 내전.
◆1999년 3월24일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인종학살 저지를명분으로 미국과 나토 유고공습 시작.6월9일 유고-나토 세르비아군의 코소보 철수 합의문에 서명.국제평화유지군 지휘하에 알바니아계 귀환시작.
전후 50여년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민족들간의 불화를 다스려온 구유고연방은 소련 붕괴와 함께 유혈 해체의 길로 내동댕이쳐졌다.이 과정에서인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행된 끔찍한 학살극 도미노를 목격해야 했다.
광기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국제사회에도 전혀 새로운 대응논리가 출현했다.인권이 침해될때는 주권국가라 할지라도 국제사회의 도덕적 응징에서 자유로울수 없다.즉 인권이 주권에 앞선다는 새 독트린이었다.이는 미국의주도에 따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 이래 최초로 주권국가에 공습을 감행하는 근거가 됐다.
◆분쟁의 배경=유고연방은 2차대전 직후 연합국 전후처리의 산물로 탄생했다.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등 인종이 판이한 공화국들을 국가로 묶어내기 위해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한 유고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보이보디나 자치주 등을 비롯한각 공화국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그러나 80년 티토의 타계,90년 소련,동독 등의 붕괴로 연대의 끈이 끊어져나가자 공화국마다 독립요구가 거세졌다.유고연방 실질적 패권세력이었던 세르비아인들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됐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유고연방 대통령은 이에 편승,잔혹한 학살극을자행했다.
◆보스니아 내전=91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92년 보스니아 회교집권세력이 각각 독립을 선포함에 따라 이 지역의 소수파로 전락한 세르비아인들은사활을 건 반격에 나섰다.한때 크로아티아의 3분의 1까지 점령했고 보스니아에서는 회교-크로아티아 연합세력에 잔혹한 학살극을 펼치기도 했다.인종청소,강간,약탈 등으로 얼룩진 보스니아 내전은 현대사 최악의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결국 국제사회가 개입했다.나토 및 유엔 등 서방의 중재아래 95년 내전 당사자들끼리 ‘데이튼 협정’이 체결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국 지위와 국경선이 확정됐다.
◆코소보 사태=코소보 독립운동은 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수십여년간 지속돼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코소보 인구의 90%를 차지하면서도 세르비아에 종속된 위치였던 알바니아인들은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선언하고 나왔다.그럴수록 코소보를 자신들의 역사적 성소로 여겨온 세르비아계의 위기감은 높아갔다.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알바니아인들을 살육,추방하는 대규모 ‘인종청소’를 통해 세르비아 국수주의를 자신의 집권연장에 이용했다.
◆미국과 나토의 대응=몇번의 경고에도 불구,학살의 잔학상이 지속되자 미국과 나토는 99년 3월24일 마침내 세르비아에 대공습을 개시한다.나토 50년 역사상 주권국가에 대한 최초의 선제공격으로 기록된 이 78일간의 공습끝에 밀로셰비치는 결국 백기를 들고 유엔 평화유지군 감시하에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귀환을 허용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발칸의 뇌관’밀로셰비치.
정권을 향한 권모술수와 사정없는 인종청소로 ‘발칸의 뇌관’으로 악명을떨쳤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58)대통령.나토공습 패배이후 최대위기에 봉착했던 그는 최근 유고 의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통과됨에따라 또한번 특유의 위기돌파력으로 정치생명 연장의 기회를 갖게 됐다.
1942년 세르비아 중부 산업도시 포자레바츠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가출,부모의 잇단 자살 등으로 극도로 불우했다.64년 공산당에 입당,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대제국 건설’을 표방하는세르비아인들의 국수주의에 편승,민족주의자로 돌변한다.
이후 그는 이민족에 대한 가차없는 차별과 통제정책으로 권력가도를 승승장구한다.코소보 자치권을 빼앗은 89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올랐고 보스니아내세르비아 반군을 전폭지원한 92년 재선됐다.그는 90년대 중반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청소를 가속화,무수한 인명을 무차별 학살해 야당의 거센반발을 샀다.결국 나토의 공습을 불렀고 본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기소된 상태다.
손정숙기자.
*코소보 왜‘피의 聖地’인가.
왜 코소보인가.
한쪽에서는 독립해 나가겠다고,다른쪽에서는 절대 내어줄수 없다고 유혈극을 불사하는 코소보.코소보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대립양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곳이다.
기독교 세르비아 정교도인 슬라브계통의 세르비아와 이슬람권 알바니아계는 공히 이곳을 자신들의 성지(聖地)로 주장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14세기 이곳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정교회 유물 및 건축을 꽃피웠다.때문에 ‘중세의 영광이 서린 땅’을 결코 내어줄수 없다는 입장.그러나 코소보는 이후 500여년간 오스만 투르크 손에 넘어갔고 같은 회교도들인알바니아계가 대량 이주,이번에는 도처에 회교사원을 건립했다.이와 함께 전체의 90%에 이르는 인구구성 등을 들어 알바니아계 역시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한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분리독립 열망은 1918년 코소보가 세르비아 영토로편입되고 46년 구유고연방으로 합병된 이후에도 국제정세가 바뀔때마다 크고작은 유혈극으로 불거져나왔다.결정적으로 89년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대통령이 그간의 자치권마저 박탈함에 따라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현재는 평화유지군이 코소보 자치를 유도하고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민족감정,역사적 배경 때문에 장래를 점치기란 쉽지 않다.
손정숙기자.
*유고 연표.
◆1389년 오스만 투르크,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강점.
◆1946년 구유고연방 탄생,코소보는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이에 편입.
◆1987년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 취임.민족주의정책의 일환으로 코소보 알바니아계 탄압시작.
◆1989년 밀로셰비치,코소보 자치권 강탈.
◆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와의 사이에 내전.
◆1999년 3월24일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인종학살 저지를명분으로 미국과 나토 유고공습 시작.6월9일 유고-나토 세르비아군의 코소보 철수 합의문에 서명.국제평화유지군 지휘하에 알바니아계 귀환시작.
2000-07-1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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