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묻힐뻔 했던 국군포로문제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역사의전면에 등장했다.
통일부는 최근 국군포로문제와 관련,‘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풀이한 의미일 뿐이다.‘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6.25 전쟁이 낳은 ‘또하나의 비극’인 국군포로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모른다.5만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전문가들은 이들중 5,000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국방부가 귀환 국군포로 및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명단을 확보한 숫자는 겨우 286명.이중 국내 연고자를 찾은 포로는 5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53년 포로로 끌려가 40여년을 탄광에서 노역하다 98년 귀환한 장무환씨(73)는 “포로로 잡힌 곳에서부터 임시수용소로 향하는 ‘죽음의 행군’도중 수많은 포로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말했다.
귀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 포로들은 수십, 수백명 단위로 무리지어진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하루 80∼90리씩 걸어 후방지역으로 이송됐다.식사라고는 삶은 옥수수 한움큼씩,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루 두번 지급됐다.
행군 대열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중상(重傷) 포로들은 사살되거나 버려졌다.
평안북도 온정리와 초산 사이에 있는 ‘개고개’에서는 수백명의 포로가 한꺼번에 학살되기도 했다.
포로들은 임시 수용소 등에 수용됐다.51년 11월 평북 벽동 남쪽 10㎞ 지점골짜기에 세워진 ‘계곡 수용소’와 평북 강계에 위치한 ‘평화의 계곡 수용소’ 등이 대표적인 임시 수용소로 꼽힌다.
특히 50년 12월 평북 북천 남방 50㎞ 지점에 세워진 ‘죽음의 계곡 수용소’는 말 그대로 악명이 높았다.이곳에 수용됐던 2,000여명의 포로 중 1,200여명만 살아 남았다는게 귀환 포로들의 증언이다.
50년 7월부터 51년 5월 사이 전체 유엔군 포로 중 42%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한 미군 당국의 추정과 엇비슷한 수치다.
국군 포로는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벽동·화풍·천마·우시·외귀·만포진·삭주·북진·강동·황주 등 평안북도 국경지역에 압록강을 따라 80㎞에 걸쳐산재한 10여곳의 수용소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인 53년 8월 겨우 8,343명만 귀환했다.부상을 입은 포로는 471명에 불과했다.
몸이 성한 국군 포로들은 전쟁 초기부터 수용소 대신 인민군에 재징집돼 전선에 투입되거나 복구작업 등 노역에 동원됐다.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 철도·비행장·광산 등의 노무부대로 편입됐다.
미송환 국군포로들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휴전 및 포로교환 사실조차 모른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56년 6월 북한 공민으로 편입된 뒤 대부분 결혼,가정을 이뤘으나 최하위층 노동현장인 탄광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8년 귀순한 양순용씨는 “국군포로들은 북한사회의 최하위층에 속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 북한전역에 엄습한 식량난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겪었다”고 말했다.
94년 귀환한 조창호씨의 경우 휴전직후 아오지 제1특별수용소로 보내져 포로가 아닌 죄수취급을 받았으며 전쟁포로 송환대상에서도 제외됐었다.51년포로가 된 조씨는 이 때문에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국립묘지에유해없는 위패로 봉안돼 있었다.
역사적인 6 ·15 남북공동선언으로 국군포로의 귀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높아졌다.국군포로의 송환은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송한수기자 onekor@
통일부는 최근 국군포로문제와 관련,‘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풀이한 의미일 뿐이다.‘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6.25 전쟁이 낳은 ‘또하나의 비극’인 국군포로의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모른다.5만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전문가들은 이들중 5,000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국방부가 귀환 국군포로 및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명단을 확보한 숫자는 겨우 286명.이중 국내 연고자를 찾은 포로는 5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53년 포로로 끌려가 40여년을 탄광에서 노역하다 98년 귀환한 장무환씨(73)는 “포로로 잡힌 곳에서부터 임시수용소로 향하는 ‘죽음의 행군’도중 수많은 포로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말했다.
귀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 포로들은 수십, 수백명 단위로 무리지어진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하루 80∼90리씩 걸어 후방지역으로 이송됐다.식사라고는 삶은 옥수수 한움큼씩,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루 두번 지급됐다.
행군 대열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중상(重傷) 포로들은 사살되거나 버려졌다.
평안북도 온정리와 초산 사이에 있는 ‘개고개’에서는 수백명의 포로가 한꺼번에 학살되기도 했다.
포로들은 임시 수용소 등에 수용됐다.51년 11월 평북 벽동 남쪽 10㎞ 지점골짜기에 세워진 ‘계곡 수용소’와 평북 강계에 위치한 ‘평화의 계곡 수용소’ 등이 대표적인 임시 수용소로 꼽힌다.
특히 50년 12월 평북 북천 남방 50㎞ 지점에 세워진 ‘죽음의 계곡 수용소’는 말 그대로 악명이 높았다.이곳에 수용됐던 2,000여명의 포로 중 1,200여명만 살아 남았다는게 귀환 포로들의 증언이다.
50년 7월부터 51년 5월 사이 전체 유엔군 포로 중 42%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한 미군 당국의 추정과 엇비슷한 수치다.
국군 포로는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벽동·화풍·천마·우시·외귀·만포진·삭주·북진·강동·황주 등 평안북도 국경지역에 압록강을 따라 80㎞에 걸쳐산재한 10여곳의 수용소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휴전협정 체결 직후인 53년 8월 겨우 8,343명만 귀환했다.부상을 입은 포로는 471명에 불과했다.
몸이 성한 국군 포로들은 전쟁 초기부터 수용소 대신 인민군에 재징집돼 전선에 투입되거나 복구작업 등 노역에 동원됐다.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 철도·비행장·광산 등의 노무부대로 편입됐다.
미송환 국군포로들은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휴전 및 포로교환 사실조차 모른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56년 6월 북한 공민으로 편입된 뒤 대부분 결혼,가정을 이뤘으나 최하위층 노동현장인 탄광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8년 귀순한 양순용씨는 “국군포로들은 북한사회의 최하위층에 속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 북한전역에 엄습한 식량난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겪었다”고 말했다.
94년 귀환한 조창호씨의 경우 휴전직후 아오지 제1특별수용소로 보내져 포로가 아닌 죄수취급을 받았으며 전쟁포로 송환대상에서도 제외됐었다.51년포로가 된 조씨는 이 때문에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국립묘지에유해없는 위패로 봉안돼 있었다.
역사적인 6 ·15 남북공동선언으로 국군포로의 귀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높아졌다.국군포로의 송환은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송한수기자 onekor@
2000-06-2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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