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50년간 토지사용 요구 강력 비판/영구 식민지화 속셈 폭로에 유생들도 궐기/개간권 확보 실패하자 대한매일 탄압 시작
대한매일은 창간직후부터 강력한 항일민족지로 발행되었다.그러나 항일논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부터였다.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였다.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표면상의 인물은 일본 대장성의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다.나가모리는 개인 자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듯이 가장했지만 사실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전국토 3분의 2가 넘어갈판
일본이 요구한 내용은 한국에서 명백하게 이용,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의 국토를 모두 개간하고 정리·개량·척식하는 권리와 그를 이용하고 이익을 거두는 모든 경영권을 우선 50년 동안나가모리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일본은 한국에서 현재 경작하고 있지 않은 땅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서 50년 동안 이를 개간하여 경영하되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또다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에 일본측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가 얼마나 될것인지 정확한 넓이가 계산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협판 윤치호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일본측에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이었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적어도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1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본국에 보고했을 정도였다.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것이며 한국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 운명이었다.
이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 양대 일간지였던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이를 폭로하였고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황성신문은 7월6일자 논설을 비롯하여 7월7일부터는 3회에 걸친 연속논설을 게재하여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대한매일이 창간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일본의 부당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7월18일 이었다.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적인 운동을 대한매일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은 창간 4일후인 22일자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하였다.이때부터 대한매일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과 영어신문에도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대한매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일논조의 영어신문 재팬 메일과 고베 해럴드와는 논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한매일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9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에 일본위력이라」는 논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이 논설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실례를 들어 일본을 공격하였다.특히 마지막부분에서는 주한 일본 공사관의 대리공사였고 침략외교의 선봉장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하기와라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던 일본 공사관의 제2인자였다.하기와라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외교관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본국에서는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한 야심에 넘치는 젊은 외교관이었다.그는 하야시와 함께 한국침략 정책에 있어서는 늘 강경파였다.
○배설추방… 신문발행 중단 공작
대한매일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하기와라는 대한매일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하기와라는 배설의 일본 공사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고 신문발행을 중단하도록 하는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대한매일은 더한층 항일적인 논조를 강화하였고 고종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대한매일을 더욱 뜨겁게 후원하였다.<鄭晉錫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대한매일은 창간직후부터 강력한 항일민족지로 발행되었다.그러나 항일논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부터였다.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얻어내어 이를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에 착수한 것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부터였다.일본은 처음에는 태국(Siam)의 땅을 얻어내려 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표면상의 인물은 일본 대장성의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다.나가모리는 개인 자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는 듯이 가장했지만 사실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었다.
○전국토 3분의 2가 넘어갈판
일본이 요구한 내용은 한국에서 명백하게 이용,경작하고 있는 토지 이외의 국토를 모두 개간하고 정리·개량·척식하는 권리와 그를 이용하고 이익을 거두는 모든 경영권을 우선 50년 동안나가모리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일본은 한국에서 현재 경작하고 있지 않은 땅에 대한 사용권을 얻어서 50년 동안 이를 개간하여 경영하되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용기간을 또다시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에 일본측이 차지할 수 있는 ‘황무지’가 얼마나 될것인지 정확한 넓이가 계산된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협판 윤치호는 전 국토의 3분의 2가 일본측에 넘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일본의 입장에 호의적이었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은 적어도 경작 가능한 토지의 3분의 1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본국에 보고했을 정도였다.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차지한다면 한국의 광대한 토지는 영구히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것이며 한국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 운명이었다.
이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 양대 일간지였던 황성신문과 뎨국신문 등이 이를 폭로하였고 주로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황성신문은 7월6일자 논설을 비롯하여 7월7일부터는 3회에 걸친 연속논설을 게재하여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대한매일이 창간된 것은 러일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일본의 부당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인 7월18일 이었다.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적인 운동을 대한매일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은 창간 4일후인 22일자에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윤치호의 글을 게재하였다.이때부터 대한매일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과 영어신문에도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대한매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에서 발행되는 친일논조의 영어신문 재팬 메일과 고베 해럴드와는 논전을 벌이면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대한매일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9월2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된 「한국에 일본위력이라」는 논설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이 논설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들춰내면서 실례를 들어 일본을 공격하였다.특히 마지막부분에서는 주한 일본 공사관의 대리공사였고 침략외교의 선봉장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하기와라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던 일본 공사관의 제2인자였다.하기와라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외교관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본국에서는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한 야심에 넘치는 젊은 외교관이었다.그는 하야시와 함께 한국침략 정책에 있어서는 늘 강경파였다.
○배설추방… 신문발행 중단 공작
대한매일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반대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하기와라는 대한매일에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하기와라는 배설의 일본 공사관 출입을 금지시키고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고 신문발행을 중단하도록 하는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대한매일은 더한층 항일적인 논조를 강화하였고 고종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대한매일을 더욱 뜨겁게 후원하였다.<鄭晉錫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1998-12-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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