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영어연설(任英淑 칼럼)

대통령의 영어연설(任英淑 칼럼)

임영숙 기자 기자
입력 1998-06-12 00:00
수정 1998-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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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중인 金大中 대통령은 의회 연설을 비롯,국제인권연맹의 인권상 수상연설·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 만찬사 등 주요 연설을영어로 했다.외교통상부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국빈(國賓)방문기간 미국에서 15회의 공식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중 8회를 영어로 할 계획이라 한다.우리말보다 영어로 하는 연설이 더 많은 셈이다.

金대통령은 지난 4월 영국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도 세차례 연설을 모두 영어로 했다.

대통령의 영어 연설에 대해서 국민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비판적인 쪽은 매끄럽지 못한 발음을 우선 문제 삼는다.그런 발음으로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른바 ‘본토발음’을 구사한다 할지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굳이 영어를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다.국가적 체통을 생각하면 공식석상에서는 전문 통역을 두고 우리 말로 연설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얘기다.특히 미국 의회연설은 그 상징성으로 보아 우리말로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신뢰감과 친근감을 높이 산다.한국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마당에 통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직접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외국인이 우리말을 우리나라 사람처럼 하면 징그럽게 보이듯이 유창한 영어 발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비록 발음이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칠순의 대통령이 국익(國益)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진솔하고 믿음직스럽다는 소박한 지지자들도 상당하다.

대통령이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우리 국민에게는 좀 낯선 일이다.한국어 발음이 오히려 서투르다 할 만큼 영어가 유창했던 李承晩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영어와 그리 친숙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무대에서 대통령이 영어를 못해 저지른 실수담(談)이라는 형식의 씁쓸한 우스개를 우리는 오랫동안 들어 왔다.실제로 우스개를 넘어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의 전신인 외무부 의전팀이 많은 곤욕을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통역이 들어갈 수 없는 다자간(多者間) 국제회의에서 미소만 띤채 앉아있는 대통령에게 비서진이 회의장 밖에서 모니터를 보고 메모를 전달하며 진땀을 뺀 경우도 있다 한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의 영어 연설을 둘러싼 지금의 설왕설래는 행복한 논란인 셈이다.민주화 투쟁 당시 옥중에서 독학(獨學)한 영어라 발음의 한계는 있지만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 의사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 金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영어는 이제 영국이나 미국등 특정국가의 말이 아니라 국제 공통언어다.세계화 시대에 국가 지도자가 국제 공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적인 조건이다.

金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외교적 실리와 명분이 면밀히 계산돼 있다.준비된 원고를 읽는 연설은 영어로 했지만 즉석 대답을 해야 하는 백악관 기자회견은 한국어로 했다.연설도 클린턴 대통령과 동시에 한 백악관 만찬 답사는 한국어로 했다.金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외신기자와의 인터뷰를 영어로 진행하다가 민감한 문제가 나오자 한국어로 대답하는 신중함을 이미 보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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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 구조조정 뿐만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대통령의 영어 연설도 단순히 발음이나 체면에 얽매어 생각할 문제가 아닌 듯 싶다.<논설위원 ysi@seoul.co.kr>
1998-06-12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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