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의 농민시장(김정일의 북한:11)

혜산의 농민시장(김정일의 북한:11)

김규환 기자 기자
입력 1997-09-04 00:00
수정 199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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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열흘장… 80년대부터 허용/장세내면 누구나 참여… 농산물로 품목 제한/밀가루에 석회분 섞고 저울눈 속여 팔기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장백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 양강도 혜산시 북쪽의 한 골목길.300여m쯤 돼 보이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상오 8시쯤부터 짐을 실은 손수레를 끌거나,보따리를 머리에 인 북한 주민들이 한두사람씩 모여들었다.30분쯤 지나자 주민들이 100여명으로 불어나며,자신의 좌판위에 각종 물건을 벌여놓기 시작했다.북한 주민들의 생존기반인 장마당(농민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간이 이발소까지 등장

장마당 한켠에서는 머리를 깎아주는 간이 이발소까지 등장했다.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흥정을 벌이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구경만하다가 발길을 돌릴뿐,거래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북한의 사회주의식 국가통제 경제체제는 이미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북한당국은 주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과 생활필수품마저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공장도 원자재와 전력을 제대로공급받지 못해 가동률이 30∼40% 선으로 떨어져 거의 빈사상태이다.사회주의 체제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중앙배급제를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북한에서 국가를 대신해 식량과 각종 생필품을 제공해주는 ‘시장’이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시장은 당국이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장마당과 당국의 눈을 피해 조그마한 골목에 몰래 서는 암시장(북한에서는 소시장이라고 부름)이 있다.장마당은 지난 80년대부터 개설되기 시작했다.일정한 장세를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10일마다 열리는 열흘장이 원칙이다.장백 전망대에서 만난 조선족 무역일꾼 곽모씨(44·여)는 “공식적으로는 1·11·21일에 장이 서는 것으로 돼 있다”며 “거래품목은 주로 자신의 텃밭에서 키운 채소·양식 등 농산물로 한정돼 있다”고 전한다.

○대도시선 1일장 형태

장마당은 현재 시는 물론 군지역까지 확대 개설되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군 소재지 등 사람이 모일만한 곳에는 100명 이상 모여들어 장터를 형성하고 있다.식량배급이 끊기고 국영상점이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등 북한의 공식적인 유통체계가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단동에서 만난 조선족 정모씨(33)는 “2∼3년전만 해도 장사꾼 10∼20명이 모여 농산품을 주로 팔았으나,요즘은 100∼200명의 장사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시장규모도 커졌다”고 말한다.평양 송신시장의 경우 1천명 이상 몰려들어 시장밖까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열흘장의 틀도 깨지고 거의 매일 들어서는 1일장 형태로 바뀌고 있는 것같다.북한 회령의 천척집을 자주 방문하는 조선족 배모씨(43)는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은 그나마 장마당에 나가야 한끼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매일 시장통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전한다.그는 평양·청진 등 대도시 주변의 장마당은 거의 매일 들어서고 있다고 덧붙인다.

○안전부요원 뇌물 강요

장마당은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생명줄’인 동시에 인심을 피폐하게 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다.연속적인 천재로 식량난이 더욱 악화되면서 장마당에는 당국의 단속 눈길을 피해 사발 등 온갖생활용품을 불법 거래하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도문 전망대에서 만난 조선족 김모씨(26)는 “당장의 한끼가 급한 북한에서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혼수품으로 장만해온 이불·그릇 등 가재도구까지 내다팔고 있다”고 말한다.

○배고픔에 도둑질도

그는 “장마당 관리를 맡은 사회안전부는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힘을 이용,공공연히 뇌물을 강요해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고 귀띔한다.

조금이라도 이문을 더 챙기기 위해 각종 범죄도 난무하고 있다.강냉이가루나 밀가루에 석회분 등을 섞어 파는 사람,저울 고리에다 핀을 끼워 저울자를 고정시켜 저울눈을 속여 파는 사람….특히 배고픔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도둑질마저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먹을 것이 없어 떠도는 어린들이나 청년들이 몰려가 좌판을 빼앗아 달아난다.장사꾼들은 물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좌판 위에다 그물을 치거나,물건을 끈으로 묶는 ‘기현상’도 보이고 있다고 한다.<장백진(중국 길림성)=김규환·손원천 특파원>
1997-09-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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