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과 1997년/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기자(서울논단)

1907년과 1997년/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기자(서울논단)

황규호 기자 기자
입력 1997-04-13 00:00
수정 1997-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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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친구처럼 지낸 선배 한 분을 만났다.얼마전에 회갑을 보냈노라는 선배는 잔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그러면서 해외여행이나 다녀오시라는 자녀들의 권유조차 뿌리쳤다고 했다.아이들이 번 돈을 축내기가 아까웠거니와,무역적자다 외채다해서 야단인 판에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 편히 살만큼은 재산을 모았다.지금은 자그마한 업체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뒷일을 돌보아주고 있다.그러니까 표본적인 자수성가형 시골사람이다.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삼겹살을 구어놓고 소주 몇잔을 기울였는데,선배는 한마디를 더했다.회갑잔치를 한답시고 사람들을 청하면 봉투 하나라도 들고 올 것이 뻔해서 부르지 못했다는 변명같은 사과의 말도 잊지 않았다.

『에라! 쫀쫀한 구두쇠같은 이라구…』 그런 생각을 했다.사실상 구두쇠에 틀림이 없었다.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의 경제위기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현자 구두쇠인지 모른다.이 사회에 구두쇠가 많이들살았다면,무역적자다 외채를 휠씬 줄였을 것이다.경제를 논리적으로 말할줄 모르는 단순한 구두쇠들.그들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시대가 되었다.

○구두쇠가 필요한 시대

지난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도 그리 거창하지 않은 구두쇠작전으로 출발했다.대구의 한 작은 출판사인 광문사 운영 멤버들이 담배를 끊어 모은 돈으로 나라빚 국채를 조금이라도 갚자고 나선 것이 그 시발이었다.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계기로 일본은 당시 조선에 돈을 빌려가라고 채근하는 이른바 차관공세를 폈다.나라는 결국 4차례에 걸쳐 1천300만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그 빚은 경제와 주권종속을 예고한 차관이었다는 점에서 위기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그래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다.지식인과 유림,전현직관리,상민과 당시 하층민까지 참여했다.부녀자들은 비녀와 반지 따위의 금붙이 패물을 아낌없이 빼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에는 요즘말로 하면 국산품애용운동이라 할 수 있는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그때에 했던 것처럼 우리가 손수 심은 목화에서 실을 자아 직조한 무명베만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는 시대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나라 경제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가를 한 번쯤 숙고하면,외국 물건에 눈을 돌릴 겨를은 더욱 없을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지 올해로 꼭 90년이 되었다.살아 남기위한 자존의 역사이기도 한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면면히 계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오늘날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빚 갚는데 보태라고 금붙이를 흔쾌하게 던질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그리고 세계는 냉혹하여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우리 민간단체들이 최근 추진중인 소비절약운동을 무역장벽으로 규정했다.지난날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한 일본 제국주의의 작태가 상기되어 입맛이 씁스레할 뿐이다.

○경제위기 극복의 지름길

그렇다고 고전적 애국을 부추기는 사람도 없다.그 옛날 독일인들에게 애국혼을 불어넣었던 J 피히테를 닮은 지성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그래서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에 길들어버린 우리가 스스로 할 일은 단하나가 있다.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구두쇠정신으로 사는 일이다.그것은 1997년 오늘의 경제위기상황에서 실천 가능한 현대적 애국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1997-04-13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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