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엔 판문점 무력시위… 민간 경협도 중단/국제 여론에 밀린 북의 사과발표로 새국면
1996년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기록된다.지난해 대북 쌀지원 과정의 앙금으로 연초부터 위태위태하게 시작된 남북대화 및 교류는 4월 북한인민군의 판문점 무력시위에 이어 9월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꽁꽁 얼어 붙었다.
남북관계의 결빙은 북한의 체제에 대한 위기와 2년째 계속된 수해로 인한 식량난 등에서 비롯된다.북한은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미·북,미·일 관계개선 등 대외관계 개선쪽으로 눈을 돌렸고 남북긴장관계의 지속이 대외관계 개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유인전략을 계속했다.결국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린 북한이 이례적으로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일단 남북관계 복원의 물꼬는 텄다.그러나 북한이 4자회담을 전제로한 3자설명회에 어떻게 나오느냐 등 태도변화에 따라 새해 남북관계도 크게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96년 시간대별 남북관계를 보면 북한은 1월 열린 정당·단체연석회의에서올해를 「민족평화 대단결의 해」로 결의,남북대화에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였다.따라서 우리측에서도 1월말 한적 주도로 제3차 대북물자지원을 재개하는등 이에 호응했다.
3월 중순,북한은 전금철 명의의 팩스를 우리측에 보내 지난해 9월 중단됐던 남북 베이징 접촉을 재개하자고 제의해 왔다.이에 우리 당국은 북한의 대남 비방등 이중전략을 거론하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4·11 총선」을 며칠 앞둔 4월4일 북한은 느닷없이 비무장지대 관리 업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3차례에 걸쳐 중무장 군인들을 비무장지대 무력시위에 동원,긴장관계를 고조시켰다.우리 당국은 이를 미·북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평가했다.
긴장관계는 6월11일 우리 정부가 북한에 3백만달러 규모의 식량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다소 호전되는 기미가 보였다.북한도 남북대화에 유화적인 내용의 조평통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이에따라 남북적십자사는 7월말에서 8월초까지 수해로 각각 떠내려온 시신을 송환하는등 한때 빈번한 연락관 접촉을 가졌다.남북경협도 북한이 나진·선봉 투자포럼(9월13일∼15일)에 우리를 초청하고 당국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때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그러나 9월초 막판에 우리측 참가자를 선별 초청함으로써 찬물을 끼얹었다.
9월18일 강릉해안에서 발견된 북한의 잠수함과 무장공비침투는 지금까지 살얼음판을 걷듯 유지해온 남북관계를 완전 결빙상태로 되돌려 놓았다.우리 정부는 잠수함사건에 대해 북한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시인 및 사과가 있으면 대북지원 등 남북관계를 복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북한은 국제사회의 여론과 내부의 경제난 등에서 탈출하기 위해 12월 29일 무장공비사건에 대해 공식사과했다.<김경홍 기자>
□96,남북관계 일지
▲1월 25일=한적,3차 대북물자 지원(라면 10만개).
▲3월 20일=북한,전금철 명의의 남북 베이징접촉 제의 팩스 발송.
▲4월 4일=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관련 임무포기 선언.
▲4월 5∼7일=북한군,판문점에서 3차례 무력시위.
▲4월 16일=한·미 정상,북한에 4자회담 제의.▲5월 23일=북한,경비정 5척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
▲6월 11일=정부,북한에 3백만달러 지원 발표.
▲8월 12일=정부,북한 나진·선봉 투자포럼 참가기업 발표.
▲8월 15일=김영삼대통령,광복절 경축사 통해 전향적 대북정책 천명.
▲9월 10일=정부,북한의 선별초청에 따라 나진·선봉포럼 불참 결정.
▲9월 13일=남북한,북한 영공 한국 민항기에도 개방키로 합의.북,나진·선봉 포럼 개최.
▲9월 18일=북한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 발생.
▲11월 20일=북한,판문점 북측 연락사무소 잠정 폐쇄.
▲12월 29일=북한,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 공식 사과.
1996년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기록된다.지난해 대북 쌀지원 과정의 앙금으로 연초부터 위태위태하게 시작된 남북대화 및 교류는 4월 북한인민군의 판문점 무력시위에 이어 9월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꽁꽁 얼어 붙었다.
남북관계의 결빙은 북한의 체제에 대한 위기와 2년째 계속된 수해로 인한 식량난 등에서 비롯된다.북한은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미·북,미·일 관계개선 등 대외관계 개선쪽으로 눈을 돌렸고 남북긴장관계의 지속이 대외관계 개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유인전략을 계속했다.결국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린 북한이 이례적으로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일단 남북관계 복원의 물꼬는 텄다.그러나 북한이 4자회담을 전제로한 3자설명회에 어떻게 나오느냐 등 태도변화에 따라 새해 남북관계도 크게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96년 시간대별 남북관계를 보면 북한은 1월 열린 정당·단체연석회의에서올해를 「민족평화 대단결의 해」로 결의,남북대화에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였다.따라서 우리측에서도 1월말 한적 주도로 제3차 대북물자지원을 재개하는등 이에 호응했다.
3월 중순,북한은 전금철 명의의 팩스를 우리측에 보내 지난해 9월 중단됐던 남북 베이징 접촉을 재개하자고 제의해 왔다.이에 우리 당국은 북한의 대남 비방등 이중전략을 거론하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4·11 총선」을 며칠 앞둔 4월4일 북한은 느닷없이 비무장지대 관리 업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3차례에 걸쳐 중무장 군인들을 비무장지대 무력시위에 동원,긴장관계를 고조시켰다.우리 당국은 이를 미·북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평가했다.
긴장관계는 6월11일 우리 정부가 북한에 3백만달러 규모의 식량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다소 호전되는 기미가 보였다.북한도 남북대화에 유화적인 내용의 조평통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이에따라 남북적십자사는 7월말에서 8월초까지 수해로 각각 떠내려온 시신을 송환하는등 한때 빈번한 연락관 접촉을 가졌다.남북경협도 북한이 나진·선봉 투자포럼(9월13일∼15일)에 우리를 초청하고 당국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때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그러나 9월초 막판에 우리측 참가자를 선별 초청함으로써 찬물을 끼얹었다.
9월18일 강릉해안에서 발견된 북한의 잠수함과 무장공비침투는 지금까지 살얼음판을 걷듯 유지해온 남북관계를 완전 결빙상태로 되돌려 놓았다.우리 정부는 잠수함사건에 대해 북한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시인 및 사과가 있으면 대북지원 등 남북관계를 복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북한은 국제사회의 여론과 내부의 경제난 등에서 탈출하기 위해 12월 29일 무장공비사건에 대해 공식사과했다.<김경홍 기자>
□96,남북관계 일지
▲1월 25일=한적,3차 대북물자 지원(라면 10만개).
▲3월 20일=북한,전금철 명의의 남북 베이징접촉 제의 팩스 발송.
▲4월 4일=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관련 임무포기 선언.
▲4월 5∼7일=북한군,판문점에서 3차례 무력시위.
▲4월 16일=한·미 정상,북한에 4자회담 제의.▲5월 23일=북한,경비정 5척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
▲6월 11일=정부,북한에 3백만달러 지원 발표.
▲8월 12일=정부,북한 나진·선봉 투자포럼 참가기업 발표.
▲8월 15일=김영삼대통령,광복절 경축사 통해 전향적 대북정책 천명.
▲9월 10일=정부,북한의 선별초청에 따라 나진·선봉포럼 불참 결정.
▲9월 13일=남북한,북한 영공 한국 민항기에도 개방키로 합의.북,나진·선봉 포럼 개최.
▲9월 18일=북한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 발생.
▲11월 20일=북한,판문점 북측 연락사무소 잠정 폐쇄.
▲12월 29일=북한,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 공식 사과.
1996-12-3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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