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 통보받고 제대… 세월지나 포기/현역 소령 아들 추적끝 “미지급” 확인/당시 소속사단서 전달… 무동타고 감격
6·25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빛나는 일등병」이 43년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되찾았다.현역 육군 소령인 아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덕이다.호국보훈의 달 6월에 옛 소속 부대에서 아들의 군복을 입고 훈장을 전달받았다.
지난 10일 창설 기념행사가 열린 제7사단에서는 노구의 김일온씨(69·농업·경남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526)가 군복 차림으로 8연대 1대대 1중대원의 무동을 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부대원들은 김씨의 43년 후배.자랑스런 「화랑무공훈장」도 가슴에 안았다.
육군 ○○부대 민심참모로 복무 중인 아들 김정태소령(40)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김소령은 아버지로부터 6·25 당시 훈장을 받았지만 손에 쥐지는 못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통보를 받으면서 제대했기 때문이다.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포기하고 말았다.
김소령은 지난 2월 같은 말을 듣고 훈장을 찾는 것이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여동안 기록을 뒤진 끝에 지난 5월 육군 부관감실 상훈과와 총무처 상훈과에서 화랑무공훈장이 미지급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훈장을 확인한 것이다.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 김씨는 훈장을 타기는 했지만 무슨 훈장인지는 알지 못했다.
김소령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씨의 투철한 군인 정신 때문이었다.김씨는 평소 『내 생일은 잊을 수 있지만 생사의 기로를 함께 하던 전우들과 군번(9241580)은 잊을 수 없다』며 43년전의 전역증과 병역수첩 등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김소령은 훈장을 확인하자 아버지의 옛 소속부대였던 7사단 사단장에게 아버지가 정식으로 신고한 뒤 훈장을 받도록 해달라는 서신을 보내 허락을 받아냈다.전역 후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도 6·25때의 공적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준 것이다.
김씨는 52년 9월에 입대해 53년 전역 때까지 7사단에 소속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날 행사를 마친 뒤에는 당시 격전지였던 화천댐 주변을 둘러봤다.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에 중국군의 공격도 치열했고 국군의 희생도 컸던 곳이다.
휴전 이틀 전 김씨의 바로 옆에 박격포탄이 떨어졌으나 나무뿌리 사이에 박히는 바람에 불발,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김씨는 후배들에게 『군인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라며 『생전에 통일을 볼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사람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강충식 기자〉
6·25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빛나는 일등병」이 43년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되찾았다.현역 육군 소령인 아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덕이다.호국보훈의 달 6월에 옛 소속 부대에서 아들의 군복을 입고 훈장을 전달받았다.
지난 10일 창설 기념행사가 열린 제7사단에서는 노구의 김일온씨(69·농업·경남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526)가 군복 차림으로 8연대 1대대 1중대원의 무동을 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부대원들은 김씨의 43년 후배.자랑스런 「화랑무공훈장」도 가슴에 안았다.
육군 ○○부대 민심참모로 복무 중인 아들 김정태소령(40)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김소령은 아버지로부터 6·25 당시 훈장을 받았지만 손에 쥐지는 못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통보를 받으면서 제대했기 때문이다.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포기하고 말았다.
김소령은 지난 2월 같은 말을 듣고 훈장을 찾는 것이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여동안 기록을 뒤진 끝에 지난 5월 육군 부관감실 상훈과와 총무처 상훈과에서 화랑무공훈장이 미지급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훈장을 확인한 것이다.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 김씨는 훈장을 타기는 했지만 무슨 훈장인지는 알지 못했다.
김소령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씨의 투철한 군인 정신 때문이었다.김씨는 평소 『내 생일은 잊을 수 있지만 생사의 기로를 함께 하던 전우들과 군번(9241580)은 잊을 수 없다』며 43년전의 전역증과 병역수첩 등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김소령은 훈장을 확인하자 아버지의 옛 소속부대였던 7사단 사단장에게 아버지가 정식으로 신고한 뒤 훈장을 받도록 해달라는 서신을 보내 허락을 받아냈다.전역 후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도 6·25때의 공적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 준 것이다.
김씨는 52년 9월에 입대해 53년 전역 때까지 7사단에 소속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날 행사를 마친 뒤에는 당시 격전지였던 화천댐 주변을 둘러봤다.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에 중국군의 공격도 치열했고 국군의 희생도 컸던 곳이다.
휴전 이틀 전 김씨의 바로 옆에 박격포탄이 떨어졌으나 나무뿌리 사이에 박히는 바람에 불발,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김씨는 후배들에게 『군인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라며 『생전에 통일을 볼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사람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강충식 기자〉
1996-06-2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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