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기에 위는 백제의 속국”/대왕 자처 백제왕의 아들·동생이 위 통치/무령왕,일 국보 우전팔번경·칠지도 하역
일본의 국보인 「우전팔번경」과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새로 해석,서기 5∼6세기의 백제위 관계를 규명한 원광대 소진철교수(정치학·64)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아 최근 논문집 「김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를 냈다.
일본어 번역본이 함께 실린 이 책의 논문 4편은 발표될 때마다 사학계,특히 일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왜가 그 당시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그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은 물론 나아가 왜가 백제의 속국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소교수의 학설은 ▲당시 백제는 왕이 「대왕」을 자처할만큼 대국이었다 ▲백제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아들을 왜에 보내 통치케 했다 ▲그들에게 통치권을 상징하는 신물로 준 것이 구리거울(우번팔번경)과 칼(칠지도)이다 ▲어려서 「왜왕 무」로 있다 백제로 귀국,왕위에 오른 이가 무령왕이다 라는 4가지로 요약된다.
그는 『내 학설의 중심에는 항상 무령왕이 존재한다.71년 무령왕릉에서 왕의 지석이 나오면서 백제·왜 관계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가 생겼다』고 말했다.즉 지석의 내용 중에 왕의 이름을 「사마」로 표기하고,백제왕이 「대왕」임을 밝힌 부분이 감춰졌던 고대사 풀이의 열쇠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소교수는 국내 학계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우번팔번경」의 명문에 「사마」 「대왕년」등의 똑같은 문구가 들어있는데 착안,연구한 끝에 이 구리거울이 무령왕이 취임기념으로 왜의 계체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밝혀냈다.
또 이를 바탕으로 한일 사학계에 의론이 분분한 「칠지도」의 명문에 대해서도 『이는 「대왕」인 백제왕이 휘왕(제후국의 왕)인 왜왕 「지」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소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송서에 기록된 「위 무왕의 상표문」을 분석해 『무는 어려서 아버지 개로왕에 의해 일본 땅으로 보내진 「사마」이며,그는 장성한 뒤 백제로 돌아와 25대 무령왕으로 등극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학설은 「무왕」등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위오왕」을 천황계보의 실체로 파악하고 있던 일본 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소교수는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일역해 주요 사학자 1백여명에게 보냈더니 긍정적인 답장이 예상외로 많이 왔다』고 밝히고 『일본 학계가 기존의 학설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그들의 연구에 토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등고시 출신으로 20년간 직업외교관 생활을 한 정치학 박사인 소교수는 고대사를 연구하게 된 이유를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 한문을 어느정도 아는데다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히 우리의 뿌리에 관심이 높아져서』라고 밝혔다.
또 국내의 사서나 국내 학자들의 논문을 거의 인용하지 않은데 대해 『국내에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별로 축적돼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 학자들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에는 아직도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한반도계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백제를 포함한 고대 한민족 국가와 왜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해명하는데 힘쓰겠다』고말했다.<이용원기자>
일본의 국보인 「우전팔번경」과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새로 해석,서기 5∼6세기의 백제위 관계를 규명한 원광대 소진철교수(정치학·64)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아 최근 논문집 「김석문으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를 냈다.
일본어 번역본이 함께 실린 이 책의 논문 4편은 발표될 때마다 사학계,특히 일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왜가 그 당시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그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은 물론 나아가 왜가 백제의 속국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소교수의 학설은 ▲당시 백제는 왕이 「대왕」을 자처할만큼 대국이었다 ▲백제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아들을 왜에 보내 통치케 했다 ▲그들에게 통치권을 상징하는 신물로 준 것이 구리거울(우번팔번경)과 칼(칠지도)이다 ▲어려서 「왜왕 무」로 있다 백제로 귀국,왕위에 오른 이가 무령왕이다 라는 4가지로 요약된다.
그는 『내 학설의 중심에는 항상 무령왕이 존재한다.71년 무령왕릉에서 왕의 지석이 나오면서 백제·왜 관계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가 생겼다』고 말했다.즉 지석의 내용 중에 왕의 이름을 「사마」로 표기하고,백제왕이 「대왕」임을 밝힌 부분이 감춰졌던 고대사 풀이의 열쇠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소교수는 국내 학계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우번팔번경」의 명문에 「사마」 「대왕년」등의 똑같은 문구가 들어있는데 착안,연구한 끝에 이 구리거울이 무령왕이 취임기념으로 왜의 계체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밝혀냈다.
또 이를 바탕으로 한일 사학계에 의론이 분분한 「칠지도」의 명문에 대해서도 『이는 「대왕」인 백제왕이 휘왕(제후국의 왕)인 왜왕 「지」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소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송서에 기록된 「위 무왕의 상표문」을 분석해 『무는 어려서 아버지 개로왕에 의해 일본 땅으로 보내진 「사마」이며,그는 장성한 뒤 백제로 돌아와 25대 무령왕으로 등극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학설은 「무왕」등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위오왕」을 천황계보의 실체로 파악하고 있던 일본 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소교수는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일역해 주요 사학자 1백여명에게 보냈더니 긍정적인 답장이 예상외로 많이 왔다』고 밝히고 『일본 학계가 기존의 학설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그들의 연구에 토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등고시 출신으로 20년간 직업외교관 생활을 한 정치학 박사인 소교수는 고대사를 연구하게 된 이유를 『한학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 한문을 어느정도 아는데다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히 우리의 뿌리에 관심이 높아져서』라고 밝혔다.
또 국내의 사서나 국내 학자들의 논문을 거의 인용하지 않은데 대해 『국내에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별로 축적돼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 학자들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에는 아직도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한반도계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백제를 포함한 고대 한민족 국가와 왜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해명하는데 힘쓰겠다』고말했다.<이용원기자>
1994-08-16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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