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왕 무는 백제의 무령왕”/원광대 소진철교수논문「상표문」서 주장

“왜왕 무는 백제의 무령왕”/원광대 소진철교수논문「상표문」서 주장

서동철 기자 기자
입력 1994-04-13 00:00
수정 199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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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의 아들로 20년간 왜국 통치후 환국/무가 송 순제에 보낸 「상표문」 보면 사실 입증/“천황계라는 일측 통설은 근거없는 억지 주장”

백제 무령왕은 10대의 어린나이에 「무」라는 이름으로 위왕의 자리에 오른뒤 적어도 20년동안 위국을 다스렸으며 그뒤 환국해 백제왕에 즉위했다는 연구가 나왔다.소진철원광대교수(정치사상)는 이같은 연구결과를 15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한일문화교류기금주최로 열리는 「제30차 한일문화강좌」에서 발표한다.

소교수는 「김석명문을 통해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라는 주제로 두편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그는 이가운데 「위왕 무의 상표문(478년)을 보고」에서 「왜왕 무」를 비롯한 5세기 「위오왕」이 천황계라는 일본측 「통설」을 『합리적인 근거나 이론의 제기가 없는 무리한 주장』이라고 전면 반박하고 『무가 송 순제에게 보낸 「상표문」으로 볼때 무는 무령왕』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측은 무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웅략천황으로 비정한다.소교수는 그러나 「서기」에 웅략은 458년에 즉위했다고적혔으나 이 해는 무의 선왕인 흥의 즉위보다 앞서는등 일본측의 이른바 「통설」은 근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무가 직접 써 송 순제에게 478년 보낸 「상표문」은 위기에 처한 백제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소교수는 「상표문」을 쓴 사람은 백제의 불운이 곧 자신의 불운으로 이어지는 백제와의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고 추정했다.그는 이어 「상표문」에는 「자신의 부형이 갑자기 죽었고…이제 망부의 유지에 따라 적(고구려)의 강토를 무찌르겠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이무렵 왜나 백제에서 있었던 왕과 왕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제 개로왕의 비참한 최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475년 겨울 고구려대군의 7일간에 걸친 공세로 창례성이 무너지고 개로왕과 대비,그리고 왕자가 아차성에서 무참히 살해됐다.무가 「상표문」에서 말한 「아버지와 형의 죽음」은 바로 개로왕과 왕자의 비참한 최후를 말한다는 것.무는 바로 개로왕의 아들로 뒤에 무령왕이 된 사마군이라는 주장이다.「송서」에 의하면 송 순제는 478년에 무가 자청한 「안동대장군·위국왕」,20년후인 502년에는 양 무제가 「정동대장군·위국왕」이라는 관호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는 무의 왜왕 재위가 적어도 20년이상 지속되었다는 증거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각각 501년 및 502년으로 적힌 사마왕,즉 무령왕의 백제환국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소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또 사마왕이 461년 「각라도」에서 탄생하고 502년 환국전까지 왜국에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사마왕이 위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소교수는 사마왕이 523년 서거한뒤 갖게 된 무령왕이라는 시호도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인자해 붙여진 무라는 왜왕 재위시절의 이름과 521년 양제로부터 제수된 「녕동대장군·백제왕」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소교수는 이날 함께 발표한 「칠지도 명문의 새로운 해석」에서도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일본 나라현 석상신궁소장)를 받은 후왕 「위왕 지」 역시 무를 비롯한 「위오왕」의 자손,즉 백제왕의후손으로 해석하고 있다.<서동철기자>
1994-04-1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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