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향로는 백제문화의 「집약체」/용무늬는 왕실의 상징… 탄생설화 묘사/도교적요소는 정치적 이상향 나타내/700년 시공 뛰어넘어 한대작품 능가하는 미 창조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사적14호)과 나성(사적58호) 사이의 건물터에서 지난해 연말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축약한 문화사 바로 그것이다.
이 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크게는 뚜껑과 몸체 두부분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뚜껑 꼭대기의 봉황장식,뚜껑,몸체,용모양의 다리부분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었다.특히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윗단에는 5인의 주악상을 앉혔다.이들 주악상의 인물은 모두 머리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묶어 내려뜨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혹은 날아가고 있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연화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부여시대(사비시대·서기 538∼660년)의 마지막 6∼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특히 발굴당시 이 향로가 매장된 장소의 정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숨가쁜 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뚜껑엔 삼산형문향
이제까지 향로가 실물로서 출현한 예로는 중국의 화북성 만성현 능산의 중산왕류승의 묘(전한·기원전 154년 재위·기원전 113년 사망),평양 서암리9의 219호낙랑고분,신안 해저출토 청동제 박산향로(원대 14세기)등을 들 수있다.
박산로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한나라때 전성기를 맞는다.그 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과 원나라에까지 사용된 것같다.그러나 박산이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뚜렷한 지명은 없고,당시 황실이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신선사상이 중심이 된 도교사상에서 유래하는 상상의 지명으로 보인다.그런가 하면 이런 향로에는 불교적 색채도 보인다.향로가 향을 피우는 불구이며 박산이란 이름이 수미산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또 이번에 발견된 것처럼 향로의 몸체 주위에 돌아가며 앙련복변판련화문이 새겨진 것도 바로 이러한 불교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향로의문양만 보더라도 백제사회에 도교와 불교사상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진나라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불사는 그 이듬해 한산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도승이 10여명 거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최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국보163호)의 말미에 쓰여진 불종율령이란 단어가 도교의 주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이는 백제왕실 깊숙히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심취했던 도교의 신선사상의 주제는 고구려고분의 벽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의 공주 송산리6호와 부여 능산리 2호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용봉문전과 산경문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앙련복판화문은 백제 전래품으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법륭사소장의 귤부인념대 아미삼존불 몸체 대좌에서도 보인다.
○5인주악사을 앉혀
사실 삼국가운데 중국의 앞선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 시키고,더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전파시킨 당시 발빠른 백제의 문화감각으로 볼때 도교는 이미 상류층의 사상과 정치구현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표현된 이 향로는 일찍이 서왕모가 중국임금인 황제에게 바친 신물이었다는 전설과 함께 태자를 책봉할 때 봉정했던 왕통의 상징일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여기에 표현된 용봉의 문양이 왕을 상징한다.또 몸체의 연화문가운데 상투를 하고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주목된다.이소년이 왕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백제인의 얼굴이나 모습은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양서 직공지에 실려있는 백제국사,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과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국보 83호)등에서 보이는 얼굴이 고작이다.그러나 이 백제 왕태자로 추정되는 얼굴 옷과 상투는 앞으로 백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전문가들의 구체적인 견해가 나오겠지만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용의 존재가 그 하나라 할 수 있다.이 용은 바로 왕가의 「탄생설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에서 나온 주몽은 난생개국신화를 가지고 탄생한다.그리고 동부여에서 부인 예씨로부터 얻은 아들 류이에게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을 통해 건국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왕태자 추정
그러나 백제 건국자 온조는 주몽 서소노 우대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그러면서 고구려 제2대왕 유리(기원전 19∼기원후 18년)를 피해 남천,하북∼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연들 때문에 왕통에 대한 정통성 부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꽤나 신경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간다.그래서 신화보다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계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향로는 바로 이 탄생설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다만 왕통을 잇는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나 신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탄생설화를 담은 향로를 만들게 한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그렇다면 몸체위의 뚜껑에 표현된 도교적인 요소는 백제왕실의 사상이나 정치적 이상향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능산리에서 새로이 발견된 향로는 기본적인 형태를 서기전 113년 중산왕의 한묘에서 출토된 금으로 상감된 청동제박산로를 법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이것이 제작된지 약 7백년후에 봉·용을 뚜껑과 몸체에 덧붙여 백제화된 향로로 만들어 낸다.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전례가 없는 걸작품에 속할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하지 않은 백제사와 문화의 여백을 상당부분 메워 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이 향로가 주는 값진 의미이다.<최몽룡 서울대교수·고고학>
◎향로의 유래/서방의 훈향풍습따라 제조/남북조시대 불교적 색채… 활짝 핀 연꽃 장식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과 한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향로라고 부른다.
이 향로의 산 부위 곳곳에 구멍을 뚫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 올라 마치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그래서 향로는 일반적으로 훈로를 말하고 있다.
박산이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려도경」에 나온다.이 도경은 한대의 문헌기록을 빌려 접시는 대해를,뚜껑은 봉래산에 비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러면서 대해속의 거북등에 봉황이 딛고 서서 봉래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덧붙인다.여기에 향을 피우면 뚜껑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향연은 신선이 내뿜는 안개와 같다는 향로 예찬론을 펴고있다.
향로에 불교적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이 시기의 대표적 박산향로는 용문석굴 21호굴의 상자모양 윗덮개와 정광3년(서기 522년) 새김글자가 있는 화상석에서 볼 수 있다.이때 비로소 몸통 아래 부위에 활짝핀 연꽃을 둘러향로를 떠받치게 된다.그리고 인동당초문등 여러 문양을 첨가함으로써 장식적 요소가 늘어난다.화려한 장식문양과 함께 향로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자재도 금속 뿐 아니라 도자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왕통의 계승을 의미하기도 했던 향로는 당·송·원대까지 계승되었다.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14세기 원대 청동제 향로에서 보듯 일체의 문양이 사라지는 향로 변천과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서동철기자>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사적14호)과 나성(사적58호) 사이의 건물터에서 지난해 연말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축약한 문화사 바로 그것이다.
이 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크게는 뚜껑과 몸체 두부분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뚜껑 꼭대기의 봉황장식,뚜껑,몸체,용모양의 다리부분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었다.특히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윗단에는 5인의 주악상을 앉혔다.이들 주악상의 인물은 모두 머리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묶어 내려뜨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혹은 날아가고 있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연화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부여시대(사비시대·서기 538∼660년)의 마지막 6∼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특히 발굴당시 이 향로가 매장된 장소의 정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숨가쁜 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뚜껑엔 삼산형문향
이제까지 향로가 실물로서 출현한 예로는 중국의 화북성 만성현 능산의 중산왕류승의 묘(전한·기원전 154년 재위·기원전 113년 사망),평양 서암리9의 219호낙랑고분,신안 해저출토 청동제 박산향로(원대 14세기)등을 들 수있다.
박산로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한나라때 전성기를 맞는다.그 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과 원나라에까지 사용된 것같다.그러나 박산이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뚜렷한 지명은 없고,당시 황실이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신선사상이 중심이 된 도교사상에서 유래하는 상상의 지명으로 보인다.그런가 하면 이런 향로에는 불교적 색채도 보인다.향로가 향을 피우는 불구이며 박산이란 이름이 수미산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또 이번에 발견된 것처럼 향로의 몸체 주위에 돌아가며 앙련복변판련화문이 새겨진 것도 바로 이러한 불교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향로의문양만 보더라도 백제사회에 도교와 불교사상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진나라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불사는 그 이듬해 한산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도승이 10여명 거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최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국보163호)의 말미에 쓰여진 불종율령이란 단어가 도교의 주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이는 백제왕실 깊숙히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심취했던 도교의 신선사상의 주제는 고구려고분의 벽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의 공주 송산리6호와 부여 능산리 2호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용봉문전과 산경문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앙련복판화문은 백제 전래품으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법륭사소장의 귤부인념대 아미삼존불 몸체 대좌에서도 보인다.
○5인주악사을 앉혀
사실 삼국가운데 중국의 앞선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 시키고,더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전파시킨 당시 발빠른 백제의 문화감각으로 볼때 도교는 이미 상류층의 사상과 정치구현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표현된 이 향로는 일찍이 서왕모가 중국임금인 황제에게 바친 신물이었다는 전설과 함께 태자를 책봉할 때 봉정했던 왕통의 상징일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여기에 표현된 용봉의 문양이 왕을 상징한다.또 몸체의 연화문가운데 상투를 하고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주목된다.이소년이 왕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백제인의 얼굴이나 모습은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양서 직공지에 실려있는 백제국사,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과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국보 83호)등에서 보이는 얼굴이 고작이다.그러나 이 백제 왕태자로 추정되는 얼굴 옷과 상투는 앞으로 백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전문가들의 구체적인 견해가 나오겠지만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용의 존재가 그 하나라 할 수 있다.이 용은 바로 왕가의 「탄생설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에서 나온 주몽은 난생개국신화를 가지고 탄생한다.그리고 동부여에서 부인 예씨로부터 얻은 아들 류이에게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을 통해 건국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왕태자 추정
그러나 백제 건국자 온조는 주몽 서소노 우대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그러면서 고구려 제2대왕 유리(기원전 19∼기원후 18년)를 피해 남천,하북∼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연들 때문에 왕통에 대한 정통성 부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꽤나 신경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간다.그래서 신화보다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계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향로는 바로 이 탄생설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다만 왕통을 잇는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나 신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탄생설화를 담은 향로를 만들게 한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그렇다면 몸체위의 뚜껑에 표현된 도교적인 요소는 백제왕실의 사상이나 정치적 이상향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능산리에서 새로이 발견된 향로는 기본적인 형태를 서기전 113년 중산왕의 한묘에서 출토된 금으로 상감된 청동제박산로를 법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이것이 제작된지 약 7백년후에 봉·용을 뚜껑과 몸체에 덧붙여 백제화된 향로로 만들어 낸다.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전례가 없는 걸작품에 속할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하지 않은 백제사와 문화의 여백을 상당부분 메워 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이 향로가 주는 값진 의미이다.<최몽룡 서울대교수·고고학>
◎향로의 유래/서방의 훈향풍습따라 제조/남북조시대 불교적 색채… 활짝 핀 연꽃 장식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과 한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향로라고 부른다.
이 향로의 산 부위 곳곳에 구멍을 뚫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 올라 마치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그래서 향로는 일반적으로 훈로를 말하고 있다.
박산이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려도경」에 나온다.이 도경은 한대의 문헌기록을 빌려 접시는 대해를,뚜껑은 봉래산에 비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러면서 대해속의 거북등에 봉황이 딛고 서서 봉래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덧붙인다.여기에 향을 피우면 뚜껑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향연은 신선이 내뿜는 안개와 같다는 향로 예찬론을 펴고있다.
향로에 불교적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이 시기의 대표적 박산향로는 용문석굴 21호굴의 상자모양 윗덮개와 정광3년(서기 522년) 새김글자가 있는 화상석에서 볼 수 있다.이때 비로소 몸통 아래 부위에 활짝핀 연꽃을 둘러향로를 떠받치게 된다.그리고 인동당초문등 여러 문양을 첨가함으로써 장식적 요소가 늘어난다.화려한 장식문양과 함께 향로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자재도 금속 뿐 아니라 도자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왕통의 계승을 의미하기도 했던 향로는 당·송·원대까지 계승되었다.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14세기 원대 청동제 향로에서 보듯 일체의 문양이 사라지는 향로 변천과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서동철기자>
1994-01-2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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