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못다부른 노해병의 망향가/부인ㆍ아들 북에두고 단신월남… 독신고수/“반드시 고향에… ” 대교류무산으로 좌절
정년을 1년 남기고 2학기 개교 첫날인 지난21일 30년동안 지켜온 교단에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운명한 서울 숭의여고 이우균교사(64ㆍ국어담당)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중구 저동 백병원 영안실에는 그를 아끼는 동료교사와 제자들의 흐느낌소리로 가득했다.
하늘도 그의 순직을 애통해 하는듯 영안실 밖은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되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소 이교사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진장철교사(57ㆍ서울혜화여고ㆍ영어담당)는 기어이 목을 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옛 제자 김연선씨(36ㆍ의사)도 『지난70년 중3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마치 학처럼 살다 가신 분』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교사는 지난 1927년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50년7월 김일성치하의 청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1ㆍ4후퇴때 단신 월남했다.
공산독재하에서 잠시 피신했다 되돌아가면 밝은 세상이 되리라 믿고 부인과 아들을 남겨둔채 떠나온 것이 지금까지 한순간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산의 아픔이 될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교사는 월남이후 지금까지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으며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재혼도 하지 않은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알며 외롭게 살아왔다.
특히 적십자회담이 별 성과없이 끝난 이후 최근 노태우대통령의 7ㆍ20선언으로 이번에는 정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민족대교류도 북한측의 생트집으로 끝나자 이산의 고통은 더욱 찢어질듯 아팠다.
천부적인 낙천가요,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이교사는 개학을 앞둔 지난주만 동료교사 몇사람과 만난 술자리에서 『8ㆍ15민족대교류도 무산되고 말았으나 다음달 북경에서 있을 아시안게임때 중국으로 가 만주의 훈춘에 꼭 들러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겠다고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때를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그런뒤 개학을 맞은 지난21일 낮12시50분쯤 중학교 1학년3반 교실에서 3교시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교단위에 앉아 학생들이 내미는 답안지를 정리하던 이교사는 「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교단밑 시멘트바닥에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 가까운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단신 월남한 직후인 지난52년 1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여러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용감한 해병용사이기도 하다.
전역후 홍익대 문학부 국문학과를 나와 60년 4월부터 지금까지 숭의여고에서 외길 교직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에서 살며 지난 30년동안 부어온 연금 2억여원을 포함,4억여원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있으나 연고자가 없고 유언도 없어 국고에 귀속될 처지에 놓인 외로운 한평생이었다.
학교측에서는 온 몸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며 평생 사도의 길을 성실히 걸어온 이교사를 위해 23일을 추모의 날로 정해 수업을 하지않고 학교장으로 성대히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서동철기자>
정년을 1년 남기고 2학기 개교 첫날인 지난21일 30년동안 지켜온 교단에서 갑자기 쓰러져 끝내 운명한 서울 숭의여고 이우균교사(64ㆍ국어담당)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중구 저동 백병원 영안실에는 그를 아끼는 동료교사와 제자들의 흐느낌소리로 가득했다.
하늘도 그의 순직을 애통해 하는듯 영안실 밖은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되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소 이교사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진장철교사(57ㆍ서울혜화여고ㆍ영어담당)는 기어이 목을 놓아 통곡을 하고 말았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옛 제자 김연선씨(36ㆍ의사)도 『지난70년 중3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마치 학처럼 살다 가신 분』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교사는 지난 1927년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50년7월 김일성치하의 청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1ㆍ4후퇴때 단신 월남했다.
공산독재하에서 잠시 피신했다 되돌아가면 밝은 세상이 되리라 믿고 부인과 아들을 남겨둔채 떠나온 것이 지금까지 한순간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산의 아픔이 될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교사는 월남이후 지금까지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으며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재혼도 하지 않은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알며 외롭게 살아왔다.
특히 적십자회담이 별 성과없이 끝난 이후 최근 노태우대통령의 7ㆍ20선언으로 이번에는 정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민족대교류도 북한측의 생트집으로 끝나자 이산의 고통은 더욱 찢어질듯 아팠다.
천부적인 낙천가요,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이교사는 개학을 앞둔 지난주만 동료교사 몇사람과 만난 술자리에서 『8ㆍ15민족대교류도 무산되고 말았으나 다음달 북경에서 있을 아시안게임때 중국으로 가 만주의 훈춘에 꼭 들러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부인과 아들을 만나겠다고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때를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그런뒤 개학을 맞은 지난21일 낮12시50분쯤 중학교 1학년3반 교실에서 3교시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교단위에 앉아 학생들이 내미는 답안지를 정리하던 이교사는 「억」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교단밑 시멘트바닥에 쓰러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켜 가까운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단신 월남한 직후인 지난52년 1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여러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용감한 해병용사이기도 하다.
전역후 홍익대 문학부 국문학과를 나와 60년 4월부터 지금까지 숭의여고에서 외길 교직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에서 살며 지난 30년동안 부어온 연금 2억여원을 포함,4억여원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있으나 연고자가 없고 유언도 없어 국고에 귀속될 처지에 놓인 외로운 한평생이었다.
학교측에서는 온 몸으로 제자들을 사랑하며 평생 사도의 길을 성실히 걸어온 이교사를 위해 23일을 추모의 날로 정해 수업을 하지않고 학교장으로 성대히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서동철기자>
1990-08-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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