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권위부재」의 세태
모두가 열심히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도심의 탁한 공기 짜증스러운 인파를 피해 근교의 자연속으로 피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훨훨 날 것만 같은 신선함을 만끽하는 양 모두의 표정이 밝고 생기가 넘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가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가벼운 눈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남녀노소가 없는 전부가 다함께 「산동무」이다.
○난데없는 “노동자 만세”
숨가쁜 열기속에 온몸에 땀이 흠뻑하다. 겨우 산 마루턱에 다다르니 제법 엄청난 일이라도 해낸듯 너 나할 것 없이 잔뜩 득의만면하다. 일행중 어느 기업체에서 온 듯한 한 젊은 패거리가 있었다. 옷 차림은 형형색색이었지만 등산모는 똑같았다. 어떤 전자회사라고 또렷이 상호가 수놓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동자 해방 만세」하고 그들 젊은 남녀 일행이 목청을 돋우며 산이라도 떠나갈세라 입을 모은 함성이다. 마루턱 언저리에 앉아 쉬고 있던 다른 산행들의 귀와 눈이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중년 등산객이걸터 앉았던 바윗돌에서 벌떡 일어서자 마자 『이 봐,이 산이 너희들 만의 산인줄 알아』하면서 소리를 왜 그렇게 크게 지르느냐고 힐책이다. 우리 눈치에도 그들 함성만이 귀에 거슬린 것이 아니라 「노동자 해방만세』라는 말도 비위에 맞지 않았는 듯 싶었다. 그러자 그 순간 만세소리는 뚝 끊겼다. 순식간에 겸연쩍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그 힐책하던 사람의 동행 한 분이 귀엣말로 『야,너 젊은 친구들한테 봉변이라도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사뭇 걱정스러운 말투가 얼핏 들렸다. 그들 젊은 패거리들은 앞길을 재촉하며 다시 산 길을 올라갔다. 약간 멀찌감치 앞질러 가더니 이젠 더 큰 목소리로 더 들어보라는 듯 「노동자 해방만세」를 되풀이 외쳐댔다.
솔밭사이를 헤쳐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힐책하던 그 친구 정말 용기있구나 하고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네가 뭔데」하는 생활풍조가 일반화 되었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내가 뭣을 말로 하건,어떤 행동을 취하건 나에 대한 참견이나 간섭은 싫다는 생각이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누구인들 자기에게 듣기 싫은 말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거기에 대한 대꾸는 「네가 뭔데」라는 그 것일 게다.
길거리에서 덧없이 침을 뱉거나 담배 꽁초라도 버리는 것을 묵도했을 때 주의라도 환기 시키면 아마 거의 대부분의 경우 「네가 뭔데」라고 반감을 갖거나 아니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는 것이 십중팔구일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중고생이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어른들은 거의가 그것을 못본 체 스쳐버리기 일쑤이다. 그것을 굳이 떼말리며 타이르는 사람은 이제 눈을 닦고 찾아보려도 찾을 길 없는 세태가 되고 말았다.
「어디 부모 말 잘 듣는 자식이 있느냐」고 내뱉는 한탄스러운 부모들의 푸념은 익혀 듣고 온 터이다. 어디 부모자식 사이 뿐이랴? 그같은 풍조는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보편화되어 있고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약속도 규범도 둔감까지 하면서 거의가 체념한 상태이다.
○합리ㆍ합법성은 어디에
가정에서의 부모의 권위도,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기업에서의 기업주와 근로자 사이에도,직장에서의 상사와 과원 사이에서도,연상자와 연하자 사이에서도,기술자와 수련공사이에서도 서열이 깨어지고 권위가 부존하는 상태는 굳어져 가고 있다.
모두가 「내가 제일이며,내가 최고인데」라는 막연한 유아독존의 발상이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네가 뭔데」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하기야 우리는 전통적으로 기존의 서열속에 살아 왔다. 젊은 사람은 연상자에게,힘 없는 사람은 권력자에게,가난한 사람은 돈 많은 사람에게,여자는 남자에게,배우지 못한 사람은 학식높은 사람에게 때로는 천대도 받고 업신여김도 당했고 고통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랬다.
이제는 자유와 평등의 시대이고 개방과 개인주의의 사회이다. 그러기에 옛 질서나 논리및 규범에 대한 거부도 있고 반항도 있을 수가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때까지 연령과 성,그리고 권력과 부에 의해 짓눌렸던 사람들이 이젠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기에 적극성은 물론 창의성과 자발성의 동인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한가지 전제가 있다. 합리적인 것과 합법성이 바로 그것이다. 「네가 뭔데」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질서있는 사회의 마음가짐도,생활태도도 아니다. 모든 생각,모든 태도와 행동은 합리성과 합법성이 전제돼야 할 것이 아닌가.
○「무정부」는 아닐텐데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성도,학생의 교수에 대한 존경도,합법적인 공권력과 법의 존업성도,정당한 노력에 의한 부의 사회적인 공감대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갖는 능력과 인격과 기술에 대한 응분의 평가도 인정치 않고 모든 것을 자유ㆍ평등ㆍ개방ㆍ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면서 「네가 뭔데」하고 정당한 충언도 합리적인 논리도 무시한 채 거부나 반항만 거듭한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독선적인 이기주의만 만연하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자유주의 개인주의 그것은 결코 무정부주의는 아닐텐데 말이다. 찜통더위 속이지만 이점 우리 모두 다함께 되새겨봄 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납량을 위해서는 약간 더운 대목이 될진모르지만.
모두가 열심히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도심의 탁한 공기 짜증스러운 인파를 피해 근교의 자연속으로 피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훨훨 날 것만 같은 신선함을 만끽하는 양 모두의 표정이 밝고 생기가 넘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가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가벼운 눈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남녀노소가 없는 전부가 다함께 「산동무」이다.
○난데없는 “노동자 만세”
숨가쁜 열기속에 온몸에 땀이 흠뻑하다. 겨우 산 마루턱에 다다르니 제법 엄청난 일이라도 해낸듯 너 나할 것 없이 잔뜩 득의만면하다. 일행중 어느 기업체에서 온 듯한 한 젊은 패거리가 있었다. 옷 차림은 형형색색이었지만 등산모는 똑같았다. 어떤 전자회사라고 또렷이 상호가 수놓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동자 해방 만세」하고 그들 젊은 남녀 일행이 목청을 돋우며 산이라도 떠나갈세라 입을 모은 함성이다. 마루턱 언저리에 앉아 쉬고 있던 다른 산행들의 귀와 눈이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중년 등산객이걸터 앉았던 바윗돌에서 벌떡 일어서자 마자 『이 봐,이 산이 너희들 만의 산인줄 알아』하면서 소리를 왜 그렇게 크게 지르느냐고 힐책이다. 우리 눈치에도 그들 함성만이 귀에 거슬린 것이 아니라 「노동자 해방만세』라는 말도 비위에 맞지 않았는 듯 싶었다. 그러자 그 순간 만세소리는 뚝 끊겼다. 순식간에 겸연쩍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그 힐책하던 사람의 동행 한 분이 귀엣말로 『야,너 젊은 친구들한테 봉변이라도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사뭇 걱정스러운 말투가 얼핏 들렸다. 그들 젊은 패거리들은 앞길을 재촉하며 다시 산 길을 올라갔다. 약간 멀찌감치 앞질러 가더니 이젠 더 큰 목소리로 더 들어보라는 듯 「노동자 해방만세」를 되풀이 외쳐댔다.
솔밭사이를 헤쳐가면서 생각해 보았다. 힐책하던 그 친구 정말 용기있구나 하고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네가 뭔데」하는 생활풍조가 일반화 되었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내가 뭣을 말로 하건,어떤 행동을 취하건 나에 대한 참견이나 간섭은 싫다는 생각이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누구인들 자기에게 듣기 싫은 말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거기에 대한 대꾸는 「네가 뭔데」라는 그 것일 게다.
길거리에서 덧없이 침을 뱉거나 담배 꽁초라도 버리는 것을 묵도했을 때 주의라도 환기 시키면 아마 거의 대부분의 경우 「네가 뭔데」라고 반감을 갖거나 아니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는 것이 십중팔구일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중고생이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어른들은 거의가 그것을 못본 체 스쳐버리기 일쑤이다. 그것을 굳이 떼말리며 타이르는 사람은 이제 눈을 닦고 찾아보려도 찾을 길 없는 세태가 되고 말았다.
「어디 부모 말 잘 듣는 자식이 있느냐」고 내뱉는 한탄스러운 부모들의 푸념은 익혀 듣고 온 터이다. 어디 부모자식 사이 뿐이랴? 그같은 풍조는 우리 생활 구석구석에 보편화되어 있고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약속도 규범도 둔감까지 하면서 거의가 체념한 상태이다.
○합리ㆍ합법성은 어디에
가정에서의 부모의 권위도,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기업에서의 기업주와 근로자 사이에도,직장에서의 상사와 과원 사이에서도,연상자와 연하자 사이에서도,기술자와 수련공사이에서도 서열이 깨어지고 권위가 부존하는 상태는 굳어져 가고 있다.
모두가 「내가 제일이며,내가 최고인데」라는 막연한 유아독존의 발상이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네가 뭔데」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하기야 우리는 전통적으로 기존의 서열속에 살아 왔다. 젊은 사람은 연상자에게,힘 없는 사람은 권력자에게,가난한 사람은 돈 많은 사람에게,여자는 남자에게,배우지 못한 사람은 학식높은 사람에게 때로는 천대도 받고 업신여김도 당했고 고통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랬다.
이제는 자유와 평등의 시대이고 개방과 개인주의의 사회이다. 그러기에 옛 질서나 논리및 규범에 대한 거부도 있고 반항도 있을 수가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때까지 연령과 성,그리고 권력과 부에 의해 짓눌렸던 사람들이 이젠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기에 적극성은 물론 창의성과 자발성의 동인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한가지 전제가 있다. 합리적인 것과 합법성이 바로 그것이다. 「네가 뭔데」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질서있는 사회의 마음가짐도,생활태도도 아니다. 모든 생각,모든 태도와 행동은 합리성과 합법성이 전제돼야 할 것이 아닌가.
○「무정부」는 아닐텐데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성도,학생의 교수에 대한 존경도,합법적인 공권력과 법의 존업성도,정당한 노력에 의한 부의 사회적인 공감대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갖는 능력과 인격과 기술에 대한 응분의 평가도 인정치 않고 모든 것을 자유ㆍ평등ㆍ개방ㆍ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면서 「네가 뭔데」하고 정당한 충언도 합리적인 논리도 무시한 채 거부나 반항만 거듭한다면 우리 사회는 끝내 독선적인 이기주의만 만연하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자유주의 개인주의 그것은 결코 무정부주의는 아닐텐데 말이다. 찜통더위 속이지만 이점 우리 모두 다함께 되새겨봄 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납량을 위해서는 약간 더운 대목이 될진모르지만.
1990-08-0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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