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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이만도와 김도현

[씨줄날줄] 이만도와 김도현

서동철 기자
서동철 기자
입력 2024-03-01 00:16
업데이트 2024-03-0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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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가 저물어 가던 무렵 선비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擧義掃淸·거의소청), 은둔해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것(去之守舊·거지수구),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自靖遂志·자정수지)으로 모아졌다. 향산 이만도(1842~1910)와 제자인 벽산 김도현(1852~1914)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실천했다.

경북 안동은 1894년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0년 이상 줄기차게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는 유학자들이 주도한 항일운동이 벌어진 지역이다. 향산은 안동 예안 출신으로 1866년 대과에 장원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어도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상소문으로 을사오적을 통렬하게 공박했고, 1910년 일제에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순국했다.

백범 김구가 머리글을 쓰고, 위당 정인보가 내용을 지은 ‘향산 이만도 선생 순국유허비’는 예안 인계리 청구마을 앞 향산공원에 있다. 고향집에서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 순국한 것은 ‘만고의 죄인이어서 편안하게 죽음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식 중 폐위된 황제에게 이런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렸다고 한다.

벽산도 스승처럼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사재를 털어 고향인 영양 청기면 상청리 마을 뒷산에 500m 남짓한 검산성을 쌓았다. 1907년에는 일경에 체포돼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1910년 자결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 상례를 치른 1914년 11월 동포에게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영덕 산수암에서 바다로 걸어들어가 순국했다. 도해순국(蹈海殉國)이었다.

삼일절인 오늘 사흘 동안의 연휴가 시작된다. 안동 일대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독립운동’을 테마로 삼아 보면 어떨까 싶다. 이 지역 항일 역사를 보여 주는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과 향산 유허비, 영양 검산성과 영덕 산수암을 묶으면 훌륭한 역사탐방 코스가 될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2024-03-0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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