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벨트의 딸, 봉건·마초사회에 ‘진보’를 던지다

러스트벨트의 딸, 봉건·마초사회에 ‘진보’를 던지다

손원천 기자
손원천 기자
입력 2020-12-17 20:30
업데이트 2020-12-18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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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오현아 옮김
마음산책/432쪽/1만 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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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조업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품은 러스트벨트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와 이념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지역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보수와 마초 문화가 자리잡은 이곳 제철소에서 일한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을 통해 양성 평등과 진보를 이야기한다. 픽사베이 제공
미국 제조업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품은 러스트벨트는 최근 몇 년 사이 정치와 이념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지역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보수와 마초 문화가 자리잡은 이곳 제철소에서 일한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을 통해 양성 평등과 진보를 이야기한다.
픽사베이 제공
美 오하이오주 밀레니얼 세대인 저자
대학생 때 성폭행당한 뒤 양극성 장애
제철소서 3년 일하며 페미니즘 도전
트럼프 지지 아버지에게 반기 들지만
일터·가족·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도

한 남자가 물었다. “클리블랜드에선 뭐가 나나요?” 한 여자가 답했다. “실패요.”

미국의 젊은 여자 둘과 남자 둘이 미팅 자리에서 벌인 대화 중 일부다. 미국의 러스트벨트 중 하나인 클리블랜드를 젊은 세대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화다. 이 대화에서 냉소적인 답변을 내놓은 여자가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의 저자다.

러스트벨트는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제조업이 발달한 미 북부와 중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한때 호황을 구가하다 제조업 사양화 등으로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다. 지난 두 번의 미 대선에서 뜨거운 이슈로 주목을 받았다. 한 번은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에 앉힌 힐빌리(가난한 백인 노동자층)의 역설로, 또 한 번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던 트럼프에게 분명한 패배를 인식시킨 곳으로.

먼저 저자의 이력부터 살피자. 그래야 책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다. 저자는 오하이오주 북부 클리블랜드가 고향인 1980년대생 밀레니얼 세대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재단의 대학에서 공부하다 두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삶의 행로가 확 바뀌었다. 저자는 사건 이후 양극성 장애라는 정신질환을 갖게 됐고, 학업은 포기한 채 마초들이 우글대는 제철소에 취직해 희망을 돈과 맞바꾼 세월을 보낸다. 책은 제철소에서 보낸 3년간의 이야기가 뼈대다. 여기에 성폭행 사건과 가족, 사랑, 학업 등의 이야기들을 씨줄날줄로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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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의 여성 노동자 하면 언뜻 페미니스트 여전사의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라고 못할 건 없어’라는 식의 교훈이 담긴 책으로만 읽혀서는 안 될 듯하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아내야 한다고 믿는 바른 길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이 과정에서 봉건과 마초, 양성 평등 등 제자리를 찾아줘야 할 이념적 지평들이 따라붙는 것이다.

이처럼 책을 한 인격체의 성장 과정이 담긴 회고록이라 규정한다면, 아마도 하이라이트는 저자와 가족들의 저녁 식사 자리가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트럼프의 편가르기와 이간질에 넘어간 전형적인 백인 남성이다. 원래부터 마초 성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업 실패 등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귓가에 들려온 트럼프의 부추김 탓에 더 강경한 공화당원이 됐다. 엄마 역시 상대적으로 유연한 편일 뿐, 가급적 딸이 불편한 순간을 만들지 않기만을 내심 바라는 여성이다.

이 자리에서 저자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다. “딸이 성폭행당했는데 어떻게 트럼프 같은 자를 지지할 수 있어?” 자신의 딸이 성폭행으로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데도, 어떻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여성의 성기를 만질 수 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을 지지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한 가정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이제 제철소에서도 금기어로 통하는 페미니즘, 진보 등의 단어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책엔 여성을 공격하는 여성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양념처럼 등장한다. 저자는 제철소를 “미국을 건설한 세대와 그들을 계승해야 할 세대를 가르는 분계선”이라 차갑게 규정하면서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제철소의 의미와 그 안의 삶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2020-12-1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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