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다시 소환된 ‘1968년’/박상숙 국제부장

[데스크 시각] 다시 소환된 ‘1968년’/박상숙 국제부장

박상숙 기자
입력 2020-06-08 18:12
업데이트 2020-06-09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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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숙 산업부장 겸 부국장
박상숙 산업부장 겸 부국장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의 1968년도 ‘화염과 분노’의 시대였다. 인종 갈등과 베트남전을 둘러싸고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졌다. 그해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됐고, 두 달 뒤엔 베트남 정책을 비판하던 로버트 케네디 의원도 괴한의 총격에 유명을 달리했다. 두 진보 인사의 죽음 이후 미국 사회는 갈등의 활화산이었다. 100여개 도시로 번진 시위는 점차 격렬해졌고, 백악관 인근에서는 기관총 난사가 벌어질 정도였다.

와중에 ‘법과 질서’(Law and Order)의 수호자를 자처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취임 이후 닉슨은 강경 태세로 일관했다. 반전 시위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는 낙인을 찍었고, 평화를 호소하는 대학생들을 “캠퍼스를 파괴하는 부랑자들”로 부르며 “쓸어버리겠다”는 막말을 달고 살았다.

국가폭력이 저지른 최악의 참사가 그의 재임 중 일어났다. 켄트주립대 반전 시위 저지를 위해 투입된 군의 발포로 학생 4명이 숨진 것이다. 이후 시위는 정점에 올라 워싱턴DC에만 15만명이 몰려들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고언에 귀를 막고 뜻을 거스르는 관리들을 잘랐다. 독불장군 행태에 당시 국방장관은 자신의 승인 없이 백악관에서 내려온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지시를 몰래 내리기도 했다.

최근 미국에서 ‘1968년’이 다시 소환됐다. 비극적으로 반복된 인종차별의 역사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전국적 시위에 연방군 투입 불사를 외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를 “법과 질서의 대통령”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선거를 5개월 앞두고 수세에 몰리자 52년 전 닉슨이 구사해 성공한 전략을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다. 코로나19 사태에다 다시 일어난 인종갈등으로 수습이 절실하지만 백인 지지층만을 바라보며 여전히 나라를 갈라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퓨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올해 대선에서 백인 유권자는 약 67%, 흑인 12.5%, 히스패닉이 17%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얻은 흑인표는 고작 8%였다. ‘성경책 인증샷’을 찍은 속셈이 다 있다.

재선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까지 트럼프는 닉슨의 궤적을 그대로 밟고 있다. ‘미치광이 전략’으로 나라 안팎에서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고, 권력 남용으로 탄핵 심판대에 올랐다는 것도 닮았다. 흑인시위에 대처하는 방식에서도 닉슨을 롤모델로 삼았다. 외부세력 개입을 언급하고 일부 폭력 시위를 과대포장하더니 급기야 시위현장에 전투헬기까지 띄우는 사상 초유의 일을 저질렀다. 닉슨 때처럼 불안해진 국방부는 백악관과 협의 없이 시위진압에 투입된 군을 철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트럼프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란 오명을 얻은 닉슨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과연 재선에 도움이 될까. 알다시피 닉슨의 말로는 험악했다. 목매던 재선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에 직면해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탄탄대로였던 재선가도가 험로로 변하자 트럼프는 닉슨의 ‘한 수´를 빌렸다. 하지만 민주주의 훼손을 일삼는 추악한 리더십의 민낯이 드러난 마당에 표심을 얻을지 의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처럼 지역과 계층, 세대를 아우르는 시위는 없었다며 분열전략이 먹혔던 1968년과는 다르다고 짚었다. 반트럼프 전선 선봉장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거리 시위대 면면을 보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를 설파하고 있다.

닉슨의 사임에 “긴 악몽이 끝났다”며 미국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사적 사건은 비극과 희극으로 되풀이된다고 한다. 이 명제가 오는 11월 트럼프에게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하다.

okaao@seoul.co.kr
2020-06-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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