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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죽고 싶지 않은 새해로 다가가려면/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열린세상] 죽고 싶지 않은 새해로 다가가려면/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입력 2019-12-26 17:08
업데이트 2019-12-27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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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연말은 연말인가 보다. 훈훈한 뉴스 시즌이다. 고립돼 살던 한 주민은 행정복지센터 직원이 사비로 밀린 통신비를 내 주면서 세상에 나왔고 기초생활수급도 받게 됐다고 한다. 지난 16일 마트에서 사과 6개와 우유 2개를 훔치던 한 남성은 주인의 선처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에게 후원하겠다는 사람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이 아닌,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숨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일을 하다 보니 ‘혼자라서 위험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지속적인 성착취 피해가 의심되는 한 발달장애 여성. 첫 만남이라 수다를 떨어 보는데 좀처럼 웃지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는 약속에 신나서 손가락을 건다. ‘그냥 지금’을 이야기하는 일이 왜 이 사람에게는 특별한 일이 되었을까.

가족이 외출할 때마다 방문 밖 자물쇠를 잠근다는 한 정신장애인. 학대 정황을 찾는다고 잔뜩 긴장한 채 들어간 그 방에서 그는 시든 풀처럼 숨죽어 있었다. 방에서만 지내느라 조현병에 폐쇄공포증까지 더해진 그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걸해야 얻을 수 있는 자유 말고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어쩌다가 이 사람의 소망이 됐을까.

얼마 전까지 아동학대 상황에 놓여 있다가 가해자들이 사법처리를 받게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일찍 독립을 한 아이. 그룹홈에서 만난 그 아이는 ‘쉼터에서는 못 쓰던 핸드폰을 여기서는 마음껏 쓸 수 있어 좋다’면서도 막막한 표정이다. 학교와 그룹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화는 게임과 소셜미디어 채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성친구는 있는지 또는 (미성년자임을 알면서도) 같이 술 마실 수 있는지 따위를 묻는 대화패턴에 벌써 질렸단다.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못한 채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내는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놀랍게도 ‘다시 집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또 매를 맞는다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통로만 있다면’이라는 조건과 함께.

노인뿐 아니라 청년도 고독사하는 시대다. 30년 뒤에는 10가구 중 4가구 이상이 1인 가구이다. 홀로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은 더이상 개인의 심리문제가 아니다. 특히 비자발적 1인 가구는 사회적 관계망에서 소외되기에 이들이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지 않도록 안전망을 구축할 필요가 크다. 그래서일까. 2018년 1월 영국 총리는 내각에 ‘외로움 담당 장관’ 직을 신설했다.

‘오늘 마음 괜찮아요?’라고 24시간 물을 수 있는 인공지능, 답변을 통해 상태와 욕구를 분석하는 빅데이터는 이미 현재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보급형 인공지능 스피커에 ‘도와주세요’ 하면, 위기상황을 인지해 인근에 지원 가능한 자원을 연결하는 기술도 물론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현실화하자는 법안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하루 37.5명이 자살하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 ‘스마트복지’라는 말은 무성한데 실체가 안 보인다. 협약식 하면서 박수 치는 그런 것 말고 진짜 ‘위험한 홀로’들의 얼굴을 마주할 기술이 법제도로 연결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걸까.

연말을 보내며 오늘도 홀로 있을 그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루 종일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는 그녀에게도, 세상과 단절된 채 욕구를 표현할 방법이 막혀 버린 그에게도 똑같이 새해는 온다. 누구나 희망을 말하는 새해. 무슨 희망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올해 국제노동기구(ILO)는 ‘일의 미래 글로벌 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Global Commission on the Future of Work)에서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의 확산이 소수 엘리트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술 혁신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불평등이 초래한 문제들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 사회 제도는 고립돼 있는 홀로들을 ‘사례관리대상자’로만 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단 열매가 낙수효과를 일으켜 모두 좋아질 것이라는 허상을 걷어내자. 이미 기술은 충분히 진보했다. 이 사회가 더 외로워지기 전에 사람을 살리는 일에 기술을 연결할 때 ‘올해도 살 만한 새해 되세요’라는 덕담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2019-12-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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