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데스크 시각]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두걸 경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두걸 경제부 차장

이두걸 기자
이두걸 기자
입력 2019-07-25 17:46
업데이트 2019-07-26 02:02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이미지 확대
이두걸 사회2부 차장
이두걸 사회2부 차장
#1. A국가는 ‘쌀 가격이 20㎏당 10만원이 되기 전까지 쌀 수입을 금지한다’는 법안을 마련했다. 쌀값 하락에 반발한 지주들을 의식한 조치였다. ‘언제까지 비싼 가격에 쌀을 사서 먹어야 하냐’는 일반 국민들의 반발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2. B국가는 원래부터 관세 장벽을 높게 쌓기로 악명이 높았다. 과세 품목의 평균 관세율이 53%를 넘었을 정도다.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현실이 다른 부작용을 덮고도 남았다.

A국과 B국은 자유무역주의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패도(霸道) 국가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A국은 19세기 초 영국, B국은 20세기 초 미국이다. 영국이 자유무역의 모태라면 미국은 자유무역을 번성시킨 주역이다. 영국이 지주 계층의 보호를 위해 활용했던 법안은 곡물령이다. 1815년 제정돼 무려 31년이나 존속한 뒤에야 폐지됐다. 20세기 초까지 미국 역시 보호주의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들이 경제력 면에서 압도적인 패권을 장악한 이후에야 보호무역주의자에서 자유무역의 전도사로 돌변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자유무역주의는 만고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더 많은 이윤의 창출을 위해 동원한 이데올로기에 가까웠다.

최근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는 자유무역 체제에 노골적으로 역행한다. 그러나 미국은 팔짱만 낀 채 지켜보고 있다. 미국의 행보는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자국 중심주의 극대화라는 면에서는 이란성 쌍둥이다. 미국은 순순히 ‘팍스아메리카나’에서 ‘팍스시니카’로의 전환을 마냥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일본 역시 ‘IT의 쌀’ 반도체 등을 무기로 부상하는 한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미국의 대중국 관세 전쟁과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는 자유무역으로 굴러가던 글로벌 경제를 뒤흔들고 있지만 이들이 정책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이라는 ‘이상’을 좇기에는 위상 약화라는 ‘현실’의 무게가 그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국 기업들의 대한국 수출이 막혀 일본이 정책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은 단견에 불과하다. 내가 당장 손실을 보더라도 경쟁자가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보면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에 해당한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압박이 장기화될 여지가 높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경제의 성장 동력이 약해지는 것 역시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1950~1970년 ‘황금기’에 세계 경제는 연평균 4.8%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대 4.4%, 1980년대 3.3%, 1990년대 2.9% 등 추세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2000년대 4.0%로 반등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 보수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기 마련이다. 유럽과 남미 등에서 우익 정당들이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봉했던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이라는 신앙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더 확실한 것은 기존 선진국처럼 국수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선택했을 때의 한계는 명확하다는 점이다. 부족하던 내수시장과 부존자원이 갑자기 커질 리 만무하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반대에 선 편이 있다면 그들은 현해탄 건너에 있다’는 식으로 적대감을 부추기는 대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앨프리드 마셜)을 갖는 것이다.

douzirl@seoul.co.kr
2019-07-26 30면

많이 본 뉴스

국민연금 개혁 당신의 선택은?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현재의 보험료율(9%), 소득대체율(40%)을 개선하는 2가지 안을 냈는데요. 당신의 생각은?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50%로 각각 인상(소득보장안)
보험료율 12%로 인상, 소득대체율 40%로 유지(재정안정안)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