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향 지킨다는 일념 하나로 뭉쳐… 전사한 후배 생각하면 눈물”

“나라·고향 지킨다는 일념 하나로 뭉쳐… 전사한 후배 생각하면 눈물”

입력 2019-04-30 19:02
업데이트 2019-05-02 09:29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2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 확대
1951년 3월 31일 대구남산국민학교 화랑통신부대 4소대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 화랑통신부대 통신병들은 모두 인천지역의 중학교 1~3학년 중학생 출신이었다. 파란색 원 안이 안두영.
1951년 3월 31일 대구남산국민학교 화랑통신부대 4소대 통신교육 수료 기념사진. 화랑통신부대 통신병들은 모두 인천지역의 중학교 1~3학년 중학생 출신이었다. 파란색 원 안이 안두영.
안두영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18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안두영(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원)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

다음은 이규원 6·26 참전사 편찬위원장이 묻고 안두영이 답하다.

→안녕하십니까, 안두영 님. 6·25 당시 인천학도의용대의 행적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기록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간 대학생 간부 형들이 그때의 활동과 업적을 기록해놨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하나도 없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시 주인공들의 나이가 60 중반이나 70의 고령들입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파묻혀 버리게 됩니다. 먼저 6·25 발발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625 당시 우리 집은 인천축현국민학교 정문 앞 수일구 한의원이었으며 아버지께서는 한의사를 하셨습니다.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집에 있었습니다. 6월 26일은 월요일이라 학교로 가서 오전에는 정상적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6월 27일은 이미 상황이 악화돼 학교에는 갈 수 없어 못 갔습니다. 7월 4일 갑자기 쇠바퀴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아침에 들려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외삼촌 댁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우리 가족도 다시 인천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997년 8월 18일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녹음·인터뷰를 하고 있는 안두영.
1997년 8월 18일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녹음·인터뷰를 하고 있는 안두영.
→9·15 수복 후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었는데, 어느 분대에 소속되셨고,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제1대대 내동분대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학도의용대에 들어갈 당시 대원들은 어린 중학생들부터였으며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치안을 돌보았고 중요 건물에 대한 경비도 하였으며 아직까지도 학도의용대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을 방문하면서 참여를 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남하하셨는데, 그 힘들었던 남하 과정을 생각나시는 데로 말씀해 주십시오.

-1950년 12월 18일 축현국민학교에는 학도의용대원들이 참 많이 모였습니다. 12월 19일 새벽 안양에 도착했습니다. 안양에서 새벽잠을 자고, 수원에 도착하니까 대구에 모이라는 연락받고 거기서부터는 각자 행동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2월 24일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대구에서 2~3일 있으려니까 다시 목적지는 마산이라 해서 삼랑진을 거쳐 마산으로 갔습니다. 12월 29일 마산에 도착했습니다.

→남하할 때 이동 방법은 어떠셨나요.

-안양에서부터는 각자 남하했으며, 다음 장소를 정하여 어디로 모이라고 하는 전언(傳言)이나 연락을 받으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식이었습니다.

→부산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하셨는데 통신학교에서의 훈련을 말씀해주시지요.

-우리들은 부산 동대신동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 가서 군복을 정식으로 지급받게 되었습니다. 지급품은 작업복 2벌, 정복 1벌, 방한복 1벌, 팬티 2장, 런닝 1장, 담요 1장, 양말 2켤레, 맞지도 않는 군화 1켤레 이것들이 통신학교에서 처음으로 받은 보급품이었습니다. 나는 유선교육대에서 유선 가설 교육을 4주 받았습니다.
1951년 9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 화랑통신부대 파견대원 일동 참전 기념사진. 인천 지역 중학교 1~3학년 재학 중에 자원입대하여 참전한 통신병들이 통신선 가설 공사를 하고 있다. 파란색 원 안이 안두영.
1951년 9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 화랑통신부대 파견대원 일동 참전 기념사진. 인천 지역 중학교 1~3학년 재학 중에 자원입대하여 참전한 통신병들이 통신선 가설 공사를 하고 있다. 파란색 원 안이 안두영.
→인천지역 중학생들로만 편성이 되어 창설된 통신부대가 있었다는데, 말씀해주시지요.

-1951년 2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인천학생 110명이 창설된 통신부대 화랑중대에 배속되었습니다. 화랑통신부대는 71 통신 가설대대(571부대)의 신설 중대였습니다. 대대본부 기간 요원으로 인천학도의용대 출신의 학생들이 기억납니다.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칠웅(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서민석(공립인천중학교 6학년)

안두영(서울중학교 6학년)

김태정(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한양배(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김진오(강화중학교 5학년)

고종순(인천중학교 4학년)

이응도(서울사범학교 4학년)

이종린(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이성진(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김태식(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6·25 국가위난(國歌危難) 속에서 인솔했던 형들은 나름 최선을 다했고, 끝까지 형들을 믿고 따랐던 학생들은 “형들을 따라가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할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형들을 따랐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안두영 님은 어떤 생각으로 참전하셨는지, 그리고 전사한 인천학생들에 대한 마음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때의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동지애(同志愛)로 뭉쳐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간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온 우리들이 힘을 모아 위령탑을 세워 전사 인천학생들 이름이라도 새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살아 돌아온 우리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또한 ‘인천시에도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참전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반갑게도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편찬사업이 시작됐다는 소식에 기쁨과 기대에 벅차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원으로 같이 활동하다가 부산까지 같이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동네 후배 김태식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슬픕니다.
1998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전사한 김태식을 참배하고 있는 이경종 편찬위원과 큰손자 이근표. 김태식은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여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1951년 3월 4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98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전사한 김태식을 참배하고 있는 이경종 편찬위원과 큰손자 이근표. 김태식은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때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여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1951년 3월 4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끝으로 인천사람들과 후대(後代)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6·25에 참전한 우리들은 일본강점기에 태어났고, 교육은 일본어로 시작해 국민학교 3~6학년 때 해방이 되어 우리나라 글을 처음 배웠고, 그 후 중학교 들어가서 좀 배우려 하니까 625가 터져,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창 공부할 나이에 입대하여 5~6년씩 군대 생활을 하고 제대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공부는 더할 수도 없게 됐고, 먹고 살기에 바빠 세월이 어느덧 흘러 이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그때 내 고향을 지키겠다는 정신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는 인천을 위해서는 아주 큰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되며, 앞으로도 인천에서 살아가는 인천사람들에게 교훈과 자부심을 같이 일깨워질 수 있도록 참전 역사를 잘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안두영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 대원

1933년 1월 26일 인천 중구 경동 출생

1950년 9월 30일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

1951년 1월 10일 육군 통신병 입대(군번 0241016)

1954년 5월 1일 만기 제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인천 중구 용동 178 (관람문의 032-766-7757)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당시 16세).
많이 본 뉴스
‘민생회복지원금 25만원’ 당신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은 22대 국회에서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해 내수 경기를 끌어올리는 ‘민생회복지원금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당은 빠른 경기 부양을 위해 특별법에 구체적 지원 방법을 담아 지원금을 즉각 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국민의힘과 정부는 행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고 맞서는 상황입니다. 또 지원금이 물가 상승과 재정 적자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지원금 지급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찬성
반대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