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엄마의 청춘/손성진 논설고문

입력 : ㅣ 수정 : 2019-03-22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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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모친의 유품을 정리하며 빛바랜 몇을 추렸다. 누렇게 변색된 사주단자(四柱單子). 60여년 동안 버리지 않고 장롱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담뱃갑보다 작은 흑백사진들. 결혼 전, 그러니까 1950년대 중반 처녀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다. 상상 밖의 젊은 시절 모습보다 사진 뒤에 써 놓은 설명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죽기도 싫고 살기도 싫다. 금자야, 장차에 나는 어디로.” 금자라는 친구와 껴안고 찍은 사진 뒤에 적어 놓은 글이다. 푸른 펜글씨, 생전 어머니의 필체가 분명하다.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앞날을 알 수 없는 전후(戰後) 막막한 현실 속의 불안감이 생생하다.

설명을 붙인 흑백사진들은 더 있었다. 흰 저고리, 검은 치마, 땋은 머리, 단발머리, 제각각의 옷차림을 한 처녀 아홉이 꽃밭에서 깔깔 웃는 사진 뒤엔 이런 글을 써 놓았다. “술 먹고 놀자. 춤도 추고 노래하자.”

교복과 평상복 차림의 남자 네 명과 한복 차림의 여자 둘이 들판에서 찍은 사진 뒤엔 “友(우·벗)들은 고민에 가득 찼고”라고 적어 두셨다.

팔순 중반에 세상을 뜬 엄마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현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젊음, 근심, 고민을 가졌던….

sonsj@seoul.co.kr
2019-03-22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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